영어로 된 계시의 원음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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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4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녹음에 관하여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독자에게 알림
당신은 두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중 하나는 이성으로 문화와 가족, 환경에 의해, 그리고 당신의 판단과 가정, 결론에 의해 대체로 형성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앎이라는 영적 마음이 있다. 앎은 심오한 통찰의 능력, 오감이 닿지 않는 정보에 접근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앎이라고 한다.
앎은 당신의 표면 마음과는 매우 다르다. 앎은 판단하지 않고, 추측하지 않으며, 논쟁하지 않는다. 앎은 사상과 가능성, 이론과 원칙의 영역을 다루지 않는다. 앎은 당신의 힘과 성실성의 본거지이며,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 이성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큰 목적을 당신을 위해 간직하고 있다.
믿음의 영역은 표면 마음의 영역이지만, 앎은 내면의 깊은 인식과 체험을 나타낸다. 마음의 표면에서는 이 모든 말이 매우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관해 앎을 직접 체험했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체험을 자신의 생각이나 가정, 결론과 연관시킬 것이고,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믿음 등과 연관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체험을 모두 자신의 기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데 이용하려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그들은 심오하고 신비로운 체험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과 믿음, 심지어는 편견까지도 어떻게든 굳건히 하려고 한다. 이것은 좋지 않은 습관으로,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
앎은 생각과 믿음의 영역 너머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앎이 강력하며, 그래서 앎을 신뢰할 수 있다. 앎은 세상에 의해 조건화되지 않았다. 앎은 세상의 유혹이나 어떤 식의 부패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은 앎에 관한 믿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앎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앎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오직 그들의 관념과 생각, 또는 어쩌면 그들의 종교 사상이나 관습에 따라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신은 오로지 추정하고, 남들과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자신이 믿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이나 연말이면 돌아오는 겨울처럼 명백한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이나 이념, 혹은 타인의 이념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앎의 현실과 어떻게 분별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앎에 관해 생각할 때, 당신은 앎에 관한 당신의 생각을 이용한다. 그러나 앎은 심오한 체험이다. 앎은 당신의 감각만이 전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하고, 인간의 논리나 다른 평가 체계를 확실히 초월한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앎은 여전히 신비롭다. 그런데도 앎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험으로, 단지 더 깊은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전부이다.
여기에서 믿음은, 특히 그 믿음의 기반이 튼튼하고 당신이 그 믿음들과 너무 깊이 동일시한다면,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앎의 힘을 체험하는 당신 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된다. 이 앎은 당신을 안내하고, 위해로부터 보호하며, 세상에서 큰 성취와 큰 삶으로 이끌기 위해 당신에게 주어졌다.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는 앎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단히 끔찍한 상황, 즉 끝없이 계속되는 가난이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 갈등과 전쟁이 있는 엄청나게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 것은 인간 가족에게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파견된 이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공헌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황에 의해 억압받고 있으며, 그들의 큰 선물은 거의 모든 경우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앎만이 제공하는 힘과 확실성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일단 삶의 기본 요건, 즉 식량과 물과 주거지를 제공하는 믿을 만한 곳, 당신이 사는 곳의 충분한 안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관계망을 갖추면, 당신은 삶에 대한 더 깊은 물음들을 품기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깊은 물음들은 당신의 이성과 믿음의 한계로 어림잡아볼 수만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신이 실재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신의 현실은 무엇보다 먼저 심오한 체험이다. 신의 존재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신의 현실이나 신과의 연결을 깊이 체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그 체험은 앎의 차원인 더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혼란의 주된 부분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심오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더 깊은 체험을 한 적이 없는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이성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모든 정체성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 교리에 기반을 두게 된다.
이것은 물론 지극히 맹목적이며 근본적인 오류와 혼란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으로부터 분리된 결과이다. 이 분리는 당신을 세상으로 오게 하여, 발현된 세상에서 살게 하였으며, 끊임없이 변하고 무수한 위협과 불확실성을 제공하는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혹하고 힘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였다.
사실, 당신의 이성은 영의 소통, 즉 앎의 소통의 매개체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목적으로 이성은 참으로 훌륭한 도구이고, 뛰어난 창작물이다.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이성을 초월하고 관념의 체계적 정리나 보호를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당신은 이성의 노예가 될 것이고, 이성은 가혹하고 까다로운 통치자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은 억압적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놀라운 소통의 도구로서, 뛰어난 기술과 총명함으로 삶의 세부사항을 평가하도록 돕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주 형편없는 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은 매우 형편없는 안내자가 된다.
이성이 그 믿음에 고정되어,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 그들과의 의견일치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그 생존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인도할 앎의 현존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므로, 당신의 표면 마음은 오만한 어린아이와 같다. 표면 마음은 더 이상 본래의 역량으로 봉사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 원래 설계되지 않은 다른 역할,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으로 행하는 다른 역할을 맡을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다른 생각, 다른 연관성을 가진 다른 마음과 충돌한다. 여기서 자신의 문화나 집단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문화나 집단과 동일시하는 사람들과 경쟁하게 된다. 즉, 자원을 두고 다투고, 권력을 두고 다투며, 이념적 우위를 놓고 다툰다. 그런데 사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그들이 모두 앎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때 더 깊은 차원에서는 갈등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창조하지 않았고 세상이 창조하지 않은 당신의 일부분이며, 신이 창조한 당신의 일부분, 어려움에 처한 세상에 독특한 공헌을 하도록 신이 세상에 파견한 당신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정보나 과거 기억의 저장소 같은 잠재의식의 사고와는 다르다.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앎은 당신의 가장 살아 있는 부분, 가장 역동적인 부분, 가장 창조적인 부분이며, 유일하게 영원한 부분이다.
자신의 생각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구별 짓고, 사회에서 자신에게 위치를 준다고 생각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므로, 앎은 여기에서 신비로운 것이 된다. 그리고 만약 앎이 완전히 거부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앎을 일종의 자원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큰 권력과 영향력을 얻기 위해 신을 이용하고, 신이 창조한 것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앎을 자원으로 이용할 수 없다. 앎은 이런 식으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며, 사실은 당신의 이성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여기에서 마음은 자신이 원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영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문제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앎을 섬기기로 되어 있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의 방편으로, 즉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인식과 행동에 안정감을 주는 수단으로, 앎을 섬기기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믿음은 상대적이다. 믿음은 개개인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하고, 다른 이들과 성공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유용성 측면에서만 가치가 있다.
신은 전적으로 믿음을 초월하며, 신이 당신을 인도하기 위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것 또한 믿음을 초월한다. 물론 당신은 앎에 관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당신은 앎을 거부하는 믿음을 가질지도 모른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되, 자신의 체험에서는 앎을 거부하는 믿음을 가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래, 앎은 존재한다.”라고 말하지만, 오직 이런 식으로만 존재한다거나, 이런 상황에서만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이 교리나 이념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이성의 오만과 무지를 나타낸다.
물론 이 세상과 우주에 있는 큰 마음들은 이 마음을 매개체로 본다. 즉, 세상에서 몸을 가진 물질적 삶과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적 삶 사이의 매개체로 본다. 큰 마음들은 이성을 매개체로 본다. 이 매개체를 통해, 당신의 오감이 현실을 전할 수 있으며, 당신의 큰 감각이 현실을 전할 수 있다.
앎은 모든 속임수를 꿰뚫어 볼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당신은 앎을 사람들이 말하는 “직감”이라는 것으로 체험할 것이며, 사람들은 이 앎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앎은 이성적 평가가 불가능하며, 이성적 평가의 산물이 아닌 어떤 것의 진실이나 거짓에 대한 인식의 체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체험을 직관이라고 부르지만, 생각으로서의 직관은 삶 속에서 앎의 의미와 힘과 현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에는 부족하다.
앎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앎의 학생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참된 체험의 현실 사이에 일종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전에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기반을 두었으므로, 이제 이러한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마치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것처럼 느낀다. 앎의 대용품을 치웠지만, 그들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고, 앎의 체험과 충분히 연결되어 있지 않아, 일시적으로 상실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앎의 큰 교육에서 “사막의 방랑기”이다. 자신의 믿음에 의존하는 것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지고, 믿음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였지만, 당신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앎과 마음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볼 수 있을 만큼 이 산을 충분히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당신은 대단히 불확실한 시기를 겪는다. 하지만 이러한 불확실성은 당신의 성장에 필수이다. 왜냐하면 앎의 힘과 현존이 당신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의 인식에서 이런 불확실성이 생길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당신은 다른 이들의 앎의 힘과 현존을 분별하기 시작하고, 앎의 힘과 현존이 믿음이나 이념과는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세상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놓고 서로 싸우고 죽인다. 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 무엇을 진리라고 여기는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 정부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 그리고 당연히 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 인간을 위한 신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놓고 서로 싸우고 죽인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비난하며, 생각을 놓고 심지어 서로 전쟁을 일으킨다. 만약 그들이 앎의 안내를 받는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만약 당신이 생각에서 해방되려면, 해방과 동시에 드러나는 내면의 큰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정말 많은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거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것조차 실제로는 어둠 속의 믿음 체계이며, 그것이 드러나면 방어 기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여기서 절대적인 확실성이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 생각에 관해, 그리고 그 생각과 관련된 다른 생각들에 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마음이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갈 수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 만든 현실에 갇혀 있다. 마음속에 새롭거나 더 나은 현실을 만든다는 생각은 그저 이 감방에서 저 감방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당신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다. 당신은 이성의 경계를 꿰뚫어 보지 못했으며, 자신의 감정이 닿지 않는 곳을 보지 못했다.
당신은 여전히 상자 안에서 살고 있다. 당신 자신의 생각 상자, 다른 사람들의 생각 상자, 사회적·정치적·종교적으로 조건화된 상자 안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이 상자 안에서 행복하게도 살지 못하고, 평화롭게도 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불안하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매우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과 반대 위치에 당신이 서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화와 화합을 이룬다는 생각마저도 매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반대할 사람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당신은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협상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더 깊은 수준에서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고착되어 있으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종교적 입장 등 자신의 입장을 단단히 지키고 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람들은 인간 정신을 억압하는 일련의 믿음과 가정과 기대에 노예처럼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형태나 체계 없이 당신이 살거나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와 문명은 형태와 체계 없이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당신이 이성이나 믿음 없이 세상을 살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이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 마음에 체계를 주며, 마음이 일관성을 가지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능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그 차이점은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어디에 서 있는지, 또 당신 삶의 더 깊은 흐름에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지에 있다. 여기서 당신은, 앎은 실제로 힘과 현존이며, 사람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앎을 찾고, 자신이 누구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누구와 더 진지하게 대화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알아본다. 생각과 믿음과 신념을 놓고 싸우는 대신, 더 깊은 연결을 찾는다. 이것은 당신의 생각이나 그 생각에 연관된 것들을 부드럽게 해주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결국 생각은 생각일 뿐이며, 마음속의 환영이기 때문이다.
문명을 작동하게 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필수인 실질적으로 유용한 생각들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갈등은 사람들이 자신을 동일시하는 생각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나 불교인, 혹은 미국인이나 브라질인,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의 본질은 정의할 수 없으며, 심지어 생각의 수준에서는 구분할 수도 없다.
그 문이 당신 내면에서 열리면, 극단주의와 편중된 태도가 누그러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이 누그러진다. 또한, 더 깊은 관점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견해나 생각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더 신중해진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체험하므로 인정과 존중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각기 다른 수준에서 자신이 실제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인식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더 깊은 영적 본성, 앎이라고 불리는 더 깊은 지성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완전히 부인한다.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생각 수준에서는 이 현실이 그들 마음에 있는 것을 허용하는 어떤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앎의 심오한 체험을 하고 있다. 그 체험이 그들의 관점을 바꾸고, 그들 마음과의 관계를 바꾼다.
당신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생각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연의 당신이 마음이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관계에는 적어도 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음, 내 생각은 내 일부야.” 당신의 생각은 확실히 당신 자신에 대한 체험의 일부이며, 심지어 당신 자신에 대한 체험을 지배할 수도 있고, 당신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체험을 하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을 주시할 수 있고 마음에 지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본연의 당신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관계가 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다른 현실을 다루고 있다. 당신은 심지어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신이 세상에 주는 선물인 준비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할 때, 당신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배우며, 표면 마음 아래에 있는 침묵의 샘, 즉 놀랍도록 신선하고 평화로운 환경, 내면에 있는 앎의 체험으로 당신을 더 깊이 데려가는 환경인 침묵의 샘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삶의 가장 큰 성취를 나타내는 이 깊은 여정은 당신의 영적 본성이 정말로 분명해지는 곳이다. 당신의 영적 본성은 교리와 믿음의 한계를 넘어선다. 당신은 영적 본성에 대한 믿음을 만들 수도 있고, 기존 교리에 맞추려고 할 수도 있지만, 체험 자체는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하다.
이 체험을 함으로써 당신은 마음과의 관계가 변하고, 마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의 생각에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더 깊은 수준에서 삶을 살게 되고, 삶의 진정한 목적과 방향을 체험하게 된다. 이 목적과 방향은 당신이 마음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모두 드러난다.
당신 내면에는 깊은 흐름이 있으며, 이 흐름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 당신의 감정 상태, 당신의 주위 상황에 변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당신은 진정한 방향을 찾을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신이 당신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당신 마음과의 관계 그리고 당신이 고수하는 생각과의 관계에 따라, 이 깊은 흐름이 당신의 외적 삶에 그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각은 당신이 취하는 입장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 중 일부는 극도로 맹목적이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이끈다. 그 점에서, 생각은 실질적 장애를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한 종교이며, 다른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이 현실을 명백하게 밝히거나, 신이 알려준 것이므로, 모순이 없는 절대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과 싸우며, 세상에서 고립된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의 믿음에 노예가 된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난동을 부릴 것이다.
이것은 본연의 자신을 마음과 몸이라고 생각하고, 생각이 자신을 규정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과 동일시한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분리의 현실이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규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살아가며, 그 규정을 넘어선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들은 눈이 멀었으며, 세상에서 파괴적이다. 분열되고, 논쟁적이고, 독선적이고, 다른 것을 고려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을 생각과 대단히 동일시하므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다시 주장하고, 자신의 신앙을 다시 주장하며, 자신의 믿음을 다시 주장해야 한다.
생각은 불안정하므로, 절대 진리가 아니다. 심지어 경전을 해석한 것조차 하나의 해석이다. 당신은 여기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 단지 유사한 것일 뿐이고, 단지 이해를 위한 시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얼마나 불안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 삶의 기초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진정한 기반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들에게 진정한 안정과 확실성, 삶의 연속성을 주는가?
이 확실성, 이 기반, 이 연속성은 더 깊은 수준에서 와야 한다. 만일 그것이 단지 생각일 뿐이거나, 믿음과 교리를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거나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일련의 생각에만 예속된 완전한 노예이다.
이때 당신은 신이 모든 사람에게 말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신은 심지어 당신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당신의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 당신과 매우 다르게 살 수도 있고 다른 사회적 관습이나 가치관을 가진 다른 나라나 부족,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도 말한다.
신은 마치 어느 한 종교의 사람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나 신이 선호하는 사람들이기나 한 것처럼, 그 종교의 사람들에게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생각 수준에서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물질 현실을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상위의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물질 현실을 넘어서면, 당신은 지금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각은 형태와 사람, 장소,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람과 장소, 사물로 이루어진 사건의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신은 이 현실 너머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삶의 끝에 심판의 날이 있다는 개념은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며,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는지 신이 알고 있는데, 왜 신이 당신을 비난하겠는가? 그래서 신이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놓았으며, 그리하여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큰 삶으로 이끌며, 이 위대한 하사품을 체험하게 한다.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당신은 믿음을 넘어서야 한다. 당신은 내면에서 심오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대신,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깊은 현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앎으로 강해지고, 앎이 당신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사슬에 묶여 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들은 수레를 끄는 소처럼, 믿음의 수레를 끌며 멍에를 메고 산다. 당신은 진정한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방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종교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든 국가, 지역, 문화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지 알기 시작할 것이다.
신은 차별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사람이 한 교사, 한 가르침, 한 종교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신은 교리나 믿음의 수준에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삶의 신비와 힘에 마음을 열어야 하고, 스스로 길을 만들거나 방향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당신 마음에 드는, 이 종교, 저 가르침 등을 선택하는 절충적 접근 결과가 아니다. 절충적 접근은 모두 마음의 선호이며, 이것은 당신이 극복해야 하는 마음이다.
당신은 지표면 위로 머리를 내밀어야 한다. 항상 이성이라는 지하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고,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떠받치고 단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체험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당신 삶에서 신의 현존인 앎의 현실을 거부할 때, 당신은 사상에 기반을 두고 거부하며, 사상과 믿음의 역사인 종교에 근거하여 거부한다. 여기서 사상과 믿음은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되고, 남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되며, 동정심을 가질 수 없는 이유, 전쟁으로 가는 이유, 남을 비난할 이유, 분노와 좌절의 삶을 살 이유, 자신을 알 수 없는 이유, 신의 은총과 힘을 체험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당신이 이 깊은 현실과 당신의 근원을 부정할 때,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며, 그곳은 당신의 생각이다. 만약 당신의 참된 기반, 참된 확실성, 진정한 힘을, 신이 심어놓은 앎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며, 당신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당신의 생각 속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분리의 문제이다.
신이 없으면, 당신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아무런 확신이 없다. 그리고 심각한 불확실성이 있는 삶, 대단히 많은 도전이 있는 삶, 당신의 생활과 안녕에 대단히 많은 위험으로 가득 찬 삶에 직면한다.
당신은 여기에서 앎이냐 믿음이냐, 오직 두 가지 선택만 있다. 앎은 믿음을 이용하고 안내하겠지만, 앎이 없는 믿음은 맹목적이고, 홀로 있으며, 비슷한 믿음을 가진 다른 이들만 찾을 것이다. 이것은 분리에서 오는 문제이다.
본연의 당신은 마음과 몸이 아니라, 마음과 몸에 깃들어 사는 큰 영이며, 마음과 몸을 이 세상에서 소통의 매개체로 이용한다. 물론, 몸은 중요하며, 높은 수준의 건강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물론, 마음도 중요하며, 성공적인 소통의 매개체가 되도록 계발되고 성장하여야 한다. 마음은 생각과 믿음과 가정을 갖겠지만, 이것들은 삶의 현실과 조건들에 맞추기 위해 항상 유연해야 한다.
이때 당신은 믿음이 진실의 최종 결정권자이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믿음은 모두 이론이므로, 더 큰 계시에 영향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음은 모두 이론이므로, 고정된 것도, 방어적인 것도 아닌, 모두 이론일 뿐이다.
깊은 인식은 이성의 영역 너머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에게 이롭게 이러한 체험을 생각해보고 평가해볼 수 있지만, 체험 그 자체는 더 깊은 수준에서 일어난다. 모든 형태의 종교와 영적 연습이 초점을 두는 것은 바로 이 깊은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당신은 다른 형태의 종교나 영적 연습에서 앎을 체험할 수 있는가? 그것들에 더 깊은 연결이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그 사상과 동일시하면서, 단지 그 사상과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종교 사상에서 안정을 찾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체험할 수 없고, 그들 삶의 깊은 흐름을 체험할 수 없다면, 그 사상을 담은 종교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그 사상은 신이 제공한 큰 기반과 확실성을 가로막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인이 되거나 이슬람교인, 유대교인, 힌두교인, 그 밖의 어떤 종교인이 되는 것은 당신 삶의 깊은 흐름을 체험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길이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종교 밖에서 이 깊은 흐름을 추구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는 근본적으로 마음과 영을 재결합하여, 마음을 영의 지휘 아래로 불러들이려고 신이 창시하였다. 여기서 마음은 왕이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삶의 진정한 지배자가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혼의 관리인과 같다.
사람들은 앎을 단순히 더 큰 지성, 더 큰 이성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앎은 당신의 표면 마음처럼 기능하지 않는다. 당신 내면의 앎은 모든 사람 내면에 있는 앎과 연결되어 있어, “당신의 앎”, “나의 앎”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나 삶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대해 논쟁할 수도 있지만, 앎의 수준에서는 말과 생각으로 논쟁하고 싸우는 것은 점점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앎은 세상에서 위대한 평화 중재자이다. 그래서 앎은 당신 삶에 힘과 확실성과 통찰력을 가져다줄 것이며, 당신 마음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놀라운 소통의 매개체로서 어떻게 이용하는지, 당신 몸과 동일시하지 않고 몸을 어떻게 돌보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일시적인 세상에서 살면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즉, 그 세상에 봉사하고, 다른 이들과 깊이 연결하며, 이 세상에 오게 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 사명은 당신에게 가장 큰 만족이 될 것이며, 당신의 혼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이해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