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인가?


1993년 11월 6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예수는 지구의 진화에 기여한 주요 인물로, 세상에서 이제 끝을 맞이하고 있는 큰 한 시대의 주요 창시자들 중 한 명이다. 우리는 세상 진화의 맥락에서 예수에 관해 이야기해보겠다. 그래야 당신이 예수의 역할을 더 깊이 이해하며, 또 그가 삶에서 실연하고 앎을 옮기는 것에 이바지하면서 실연한 큰 결과들을 더 깊이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의 성장과 진화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들 중 한 명이 되도록 그의 영적 가족이 세상에 파견했다. 우리는 이것을 문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목적은 인류를 부족의 정체성과 부족적 고립에서 국가나 인종 사이에 서로 관계를 맺는 쪽으로 서서히 데려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나 인종 사이에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은 대격변이었고 매우 어려웠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인류가 부족의 상태로만이 아니라, 많은 인종과 문화, 사상과 믿음을 나타내는 더 큰 상태로도 자리잡도록 이끌었다.

기독교와 다른 모든 주요 종교는 문화나 인종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이 종교들은 단순히 한 부족이나 한 집단의 종교가 아니며, 인류 모두를 위한 종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그 종교들을 신봉하고, 따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종교들이 사람들을 분리하고 떼어 놓는 것처럼 보이는 통상적인 경계들에 다리를 놓는다는 말이다. 용서의 종교, 신과 재결합하는 종교, 인간 성장의 종교, 연민의 종교 등 세계 종교의 진화에서 나타나는 이 모든 거대한 움직임은 세계 종교의 설립으로 조성되었으며, 이것은 세상을 현재 상태에 이르도록 했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 세상이 끔찍한 상태이고, 인류를 더 큰 결합으로 데려가기 위한 많은 일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2천 5백 년 전 지구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류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것이다. 당신은 인류가 얼마나 많이 서로 섞여 지내고, 자신의 사상과 더 깊은 열망과 성향을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기반과 근거를 얼마나 많이 찾았는지를 알 것이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말했듯이, 종교는 세상의 현재 진화 상태에서 세상에 봉사해야 한다. 세계 주요 종교는 모두 다른 민족들과 더 큰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인류를 진화하게 했다. 이것은 특히 기독교에서 그렇다. 기독교는 지구촌 전역에 들어가, 다른 방식으로는 서로 교류하지 않았을 사람들을 이제 연결한다. 이제 그들에게는 공통의 믿음이 있고, 공통의 의례와 공통의 의식이 있다. 이것은 여전히 부족 정체성에 깊이 빠져 있는 세상에서 놀라운 성과이다.

연민과 용서와 헌신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의 본보기는 모두 이 크고 어려운 분리의 간격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통합하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 예수의 성취는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현시대의 문명은 주로 부족 문명이던 초기 문명과는 다르다. 현시대에서 문명은 하나의 부족이나 하나의 언어, 하나의 집단, 하나의 가족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계를 훨씬 넘어 연결된다. 그리고 비록 이러한 모든 변화와 성장 과정에서 인류는 서로 싸우고 다투었지만, 그런데도 부족의 관습과 정체성을 뛰어넘어 인류 체험을 할 수 있는 더 큰 토대가 마련되었다.

기독교가 도입된 당시, 기독교는 혁명적이었다. 기독교는 국가들과 여러 민족에게 그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독교는 단지 한 그룹이나 한 지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한 부족이나 한 민족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기독교는 여러 문화와 여러 민족 사이의 틈에 다리를 놓아, 삶에서 더 높은 연합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인정과 소통과 협력을 위한 더 큰 기반을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때 이래로 인류는 이 도전으로 씨름하고 있지만,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큰 공동체에서는 앎 자체로 정의된 성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예수는 신과 관계를 직접 맺기 시작했다. 이 관계는 개개인 내면에 있는 신의 현실을 강조하고, 개인적 계시와 영적 성장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 후 줄곧 인류는 이 문제로 씨름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세상에 있고,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여러 나라의 수백만 명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성과이다. 이렇게 널리 받아들여진 기독교는 국제 문명사회의 종교이다. 지구에서 창시되어 현대 사회로 진보한 다른 많은 종교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공헌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사실 여기서 지혜는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얻을 수 있다. 예수 이전의 삶과 예수 이후의 삶은 다르다.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이 변화가 제대로 효과를 보기까지는 수 세기가 걸렸지만, 실제로 제대로 효과를 보았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의 전파는 파괴적이고 부도덕했다. 하지만 진화 과정을 따르고 있었으며, 일어나야 했다. 세상이 지금 큰 공동체에 출현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과거 수 세기 동안 국가들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지배하고, 자신의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제 우리에게는 단순한 부족 종교가 아닌 세계 종교가 있다. 세상에서 문화와 사회가 발전한 진화 과정을 고려해보고, 또 종교적·영적 이해의 진보와 진화를 고려해보면, 이것이 큰 진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는 봉사하고자 하는 종족의 진화와 항상 보조를 맞춰야 한다. 종교가 이렇게 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종교가 얼마나 유익할지, 얼마나 큰 봉사를 제공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인류가 2천여 년 전에 직면한 것보다 훨씬 더 큰 문턱인 새로운 문턱에 있다. 인류의 큰 공동체 출현은 인류가 경험한 것 중 가장 큰 도전이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다. 이 큰 문턱은 단순히 한 집단, 한 국가, 한 문화가 아니라, 모두가 직면할 것이다. 이 문턱은 진정으로 세계를 통합할 가능성을 지녔다. 또한, 지구의 인종들을 분열하게 하여 최후의 자멸로 몰고 갈 가능성도 지녔다.

인류가 진보할 수 있게 하려면, 또 큰 공동체에 있는 더 큰 환경에, 그리고 그 환경이 초래한 모든 문제와 기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려면, 종교는 진화해야 한다. 비록 예수가 이곳에 기반을 구축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심지어 기독교도 완전히 새롭게 놓인 환경들에 대응하기 위해 진화해야 한다.

오늘날 세상에서 큰 공동체 인식에 대한 저항감은 주로 세계 종교들 안에 형성되어 있다. 이 종교들은 인간을 위한 종교들이며, 인간의 신과 인간의 주안점을 가진 인간의 종교들이다. 이 종교들은 큰 공동체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큰 공동체 삶의 현실은 이 종교들의 계율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며, 이 계율을 바탕으로 구축된 제도들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상당 기간 큰 공동체 삶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데 가장 큰 저항은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그 신앙의 옹호자들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종교는 세상의 진화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래서 바로 이 시기에 큰 공동체 앎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큰 공동체 앎길은 정확히 때맞추어 왔으며, 당신이 사전에 준비하도록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큰 공동체 세력들이 지금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류에게 주는 영향력과 환경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당신은 단지 그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과 접촉할 준비, 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종교 체험을 위한 새로운 기반이 필요하다. 세계 종교들이 다음 시대 인류의 성장과 진화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기반이 필요할 것이다.

종교에는 수명이 있다. 이것은 큰 공동체를 통틀어 사실이다. 종교는 성장 시기에 봉사하므로, 수명이 있다. 그래서 종교는 대체되거나, 아니면 적응하기 위해 변하고 확장한다. 만약 종교가 적응할 수 없다면, 대체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종교의 가르침과 주안점이 삶의 현실에 점점 더 관련이 없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에서는, 종교가 창시되어 성숙기에 이르면, 그다음은 소멸하는 노년기에 들어간다. 종교들은 노년기 중에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메시지를 받아, 종족의 영적 활력을 회복하고 새롭게 할 수 있으며, 삶이 확장하고 성장하고 있으므로 삶과 직결된 문제에 이 활력을 줄 수 있다.

예수는 전 세계 사람에게 봉사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큰 성장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행보가 유일한 예는 아니었지만, 그는 주요 인물이었다. 비록 그가 우상화되고 신격화되었지만, 또 비난과 경멸을 받았고, 집단과 조직과 부족과 정부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를 이용했지만, 그의 본보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문화와 종족, 경제적 지위, 언어, 성향의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지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의 본보기는 관계에 대한 더 큰 기반, 인지에 대한 더 큰 기반, 상호 발전과 성취에 대한 더 큰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국제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필요했으며, 인류가 기술 시대로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데도 필요했다.

이제 당신은 새로운 시작점에 있다. 이제 당신에게는 큰 도전이 있다. 예수는 그의 시대와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과 인식을 훨씬 뛰어넘어 확장하는 어떤 과정을 창시하는 데 매우 가시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이 자신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다른 세대 사람들에게도 폭력과 전쟁과 큰 고난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심지어 그조차도 당시에는 그의 공헌이 끼치는 전체 범위와 영향을 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이용될지, 그리고 장래에 어떻게 오용되고 남용될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큰 진실을 실연하였다. 사람들의 목적은 아무리 크든 작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세상에 필요한 것들과 세상의 진화에 따라야 한다는 큰 진실을 실연하였다. 여기서 종교는 인류 발전의 전 시대에 봉사한다. 큰 공동체 관점, 즉 당신이 이제 배우고 활용할 기회를 갖는 큰 공동체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인류보다 더 진보하고 더 오래전에 정착한 국가들의 역사를 보고, 탐닉과 조작과 무지로 자멸한 문명의 경험을 보면, 종교가 생겨나서 변하고 소멸하는 것은 보편적 원칙으로써 모든 곳에서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종교에는 수명이 있다. 그 수명은 그 종교를 창시한 이의 수명을 훨씬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종교가 소개된 세상의 더 큰 진화와 발전과 관련하여 봉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에 있는 어떤 종교들은 소멸할 것이다. 어떤 종교들은 새로워지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주안점을 가지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다. 기존 기독교는 새로운 환경에 잘 대응할 수 없다. 기존 기독교는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한 개인의 경험이 갖는 수명과 범위 안에서처럼, 기존의 태도로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기존 믿음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대응할 수 없으며, 기존 정체성으로는 새로운 정체성과 상호작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류가 큰 공동체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인류의 종교가 삶의 이 큰 무대와 참여 속으로 진화해야 한다. 종교들은 과거를 참조하는 것 없이 이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지나갔고 삶은 바뀌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면서 시대를 초월한 그런 원칙들은 이제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한다. 그 원칙들이 고대의 잔재로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영구적인 것은 변하는 상황에서 표현을 찾아야 하므로, 그 원칙들은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한다. 그 표현들이 바뀔 것이다. 표현의 양식이 바뀔 것이며, 표현의 주안점이 바뀔 것이다.

예수가 창시한 것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만 그럴 뿐이다. 그의 가르침이 된 것은 큰 공동체 맥락에서 크게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헌신, 용서, 관용, 영적 정체성에 대해 그가 강조한 것은 영구적 가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창시자와 그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의 설립을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신과 인간의 주안점을 가진, 인류를 위한 종교이다. 기독교는 큰 공동체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큰 공동체의 삶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기독교의 신학이 변하고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신에 대한 기독교의 관념이 변하고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신의 세상 관여에 대한 개념이 엄청나게 커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과거의 민속 신앙과 분리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신학과 적용은 변하고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기독교는 소멸할 것이다. 기독교의 옹호자들이 아무리 맹위를 떨치고, 아무리 기독교가 강력하게 부활하는 것처럼 보여도, 변하는 세상의 현실에 압도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삶을 새롭게 마주하려면, 새롭고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마음은 새로워져야 하고 신선해져야 한다.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성장 단계에 접어들면, 이전에 효과가 있던 것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거나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체험을 하려면,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기존 신앙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이 필요하다. 기존 종교 체험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 체험이 필요하다. 당신은 지금 앞을 보아야 하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인류가 큰 공동체 현실을 인식하고 이곳 세상에서 개인 생활과 국민 생활에 끼치는 큰 공동체 영향을 인식하면서, 점점 더 많이 제기될 엄청난 인류 문제와 더 큰 도전을 고려해볼 때, 많은 종교가 사라질 것이고, 오랫동안 지속한 많은 관념과 그 관념의 연합이 사라질 것이다.

큰 공동체 앎길은 큰 공동체를 대비한 준비만이 아니라, 종교적 이해와 체험을 위한 새로운 기반이다. 즉, 세계 종교들이 새로 관련된 것을 가지고 새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다. 그런데도 세계 종교 중 일부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과거에 얽매이고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 현실은 그 종교들에 너무 벅찰 것이다. 종교들의 생존 여부는 그 종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이것은 그들의 적응 능력,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체험을 쇄신할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변화는 엄청날 것이다.

큰 공동체에 대해 인간은 오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인류는 축복받은 종족이고, 큰 공동체의 나머지 종족은 신의 하사품을 받지 못한 야만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은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배우고 진화하고 적응하는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앞에 놓인 더 큰 도전에 대처하는 자신의 능력을 부정할 것이다. 인류는 축복받은 종족이 아니며, 유일하지 않다. 인류는 창조의 중심부에 있지 않으며, 신의 총애를 받는 아이가 아니다. 신의 일은 모든 곳에 있다. 큰 공동체에 있는 모든 진정한 종교는 앎을 통해 창시되며, 개개인들이 자신이 사는 환경 안에서 삶의 큰 목적과 의미를 체험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론을 확립한다.

이제 단순히 인간 심리학이나 인간 사회학으로 이루어진 신학이 아닌, 우주 신학이 필요하다. 당신이 인류의 공통 기반을 찾을 수 있도록 인류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차이를 메꾸고 인류를 통합하려면, 당신에게는 이 우주 신학이 필요하다. 삶에서 진정한 공통 기반은 앎 자체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것이 있다. 이 공통 기반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개인적 야망이나 탐욕, 적개심에 지배받지도 않는다. 이제는 영웅이나 우상 숭배가 있는 길이 아니라, 앎길을 가야 할 때이다. 지금은 환상적인 이야기나 신화를 믿는 때가 아니다. 지금은 진정한 본보기와 진정한 신뢰, 진정한 체험이 필요한 때이다.

인류의 지적 범위와 이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인류의 종교들은 대체로 여기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이제 인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종교를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구가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고, 당신은 그 출현에서 지구에 봉사하고, 그 출현이 의미하고 요구하는 모든 것에 봉사하러 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천국과 지옥을 믿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세상에 와서 공헌하고 참여할 때이다. 지금은 신이 심판하여 불신자들을 비난하고 지옥의 불길 속으로 던질 것이라고 믿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성장이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응답할 수 있고, 그에 맞추어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수혜자이자 자신의 종족에 큰 공헌자가 될 것이며, 이리할 수 없는 이들이 삶에서 어떤 지위와 처지에 있더라도 얻지 못할 만족감을 경험할 것이다.

예수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의 위대한 실연과 그 실연에 대한 많은 오해, 그에 대해 일어난 엄청난 우상화로 인해, 그는 지구의 불가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지구뿐만 아니라, 인류와 마주할 운명의 종족이 있는 행성들에서 불가시 존재이다. 그는 세상에 재림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이 그를 대변한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는 재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그의 사명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일은 불가시 존재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관념을 상당히 확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불가시 존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최고 권위를 가진 이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생을 마치면, 다음 단계의 생에서 초보자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순히 천국으로 돌아가 휴식하면서 영겁의 세월을 보내지 않는다. 당신은 봉사와 활동, 학습과 준비의 또 다른 단계로 진입한다.

예수는 세상에 있다. 위안을 얻으라. 하지만 육신을 가지고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육신을 가지고 누가 다시 온다면, 그는 큰 공동체에서 온 이일 것이다. 조심하라. 당신이 앎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알 것이고 속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열정적으로 믿고 싶어 하고, 믿음의 나약함에 지배당한다면, 당신은 설득당할 수 있다. 큰 공동체에서 온 이들은 당신에게 기적처럼 보이는 것을 행할 수 있다. 그들은 마법처럼 보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이것 때문에 믿음과 경외심에 빠질 것이다. 지구는 아직 큰 공동체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신이 보여준 현실과 큰 공동체가 보여준 것들을 구분할 만큼 충분한 분별력이 없다.

예수는 앎을 보강하면서 지구에 있다. 예수는 다른 세계에도 있다. 왜냐하면 인류의 운명은 지금 다른 세계와 인류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공 가능성은 앎에 응답할 수 있는 이들에게 말하는 불가시 존재들이 보강해야 한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큰 공동체 앎길은 여기서도 배우고 다른 곳에서도 배우므로, 이것은 가능하다.

예수는 그의 사례와 실연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지만, 이보다 더 나아가서, 그는 영적 입문과 성장과 발전의 과정을 시작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지녔다. 그러나 그의 실연을 바탕으로 세워진 신학은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실연은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앎의 실연이고, 그것을 목격할 수 있는 이들 안에 있는 앎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체계에 대한 신뢰가 아니며, 일련의 교리에 대한 신뢰도, 교회 위계질서에 대한 신뢰도 아니다. 이것은 한 마음에서 다른 마음으로 앎을 직접 전달하는 것에 대한 신뢰이다. 이 점에서, 예수는 큰 힘이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세상에 있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국제 문명의 시대가 아니며, 통합된 세계 문명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것은 훨씬 더 큰 도전이며, 많은 시간이 걸리고 아마도 달성하는 데 많은 투쟁이 필요한 도전이다. 세계 문명에 필요성을 부여하고 자극을 줄 것은 지구의 큰 공동체 출현이다. 아무리 당신이 이웃을 불신하더라도, 또 남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속한 문화의 가치관과 관습과 윤리가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하다고 느끼더라도, 지구에 있는 큰 공동체 세력들이 드리우는 먹구름으로 이 모든 차이는 평등해지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큰 공동체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복원 가능성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변화가 필요하고, 협동이 필요하며,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또한, 해묵은 분쟁과 다툼을 제쳐 두는 것이 필요하고, 단지 한 국가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세계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사람들 사이의 더 큰 유대 관계, 그리고 더 큰 존중과 관용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은 지구가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출현에 한 역할을 하겠지만, 삶에 일어나고 있는 큰 변화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는 이제 간섭하지 않고 조언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실연을 보여주었고, 이제 더 크고 더 고귀한 봉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안점을 앎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 영성의 본질이고, 당신에게 삶의 새로운 방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믿음이나 관념, 원칙, 이미지, 창조 이야기에 주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삶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면, 삶은 당신을 움직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삶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면, 당신의 영성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표현의 가능성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예수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예수가 과거에 실연한 것, 그리고 세상에서 격려하고 불러일으킨 선행을 당신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신은 그가 특별한 봉사를 하려고 특별한 시기에 생명으로 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는 숨어 지내지 않았으므로, 그의 삶은 예외적이었다. 그는 숨어 지내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가 실연한 것은 기억될 수 있도록 매우 가시적이어야 했다. 비록 그의 삶을 중심으로 많은 환상이 만들어졌고, 전 세계적으로 세속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의 삶이 조작되고 이용되었지만, 그가 실연한 동정심과 관용, 공통의 정체성은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큰 영향력을 가진다.

여기서 당신은 종교와 영성을 구별해야 한다. 종교의 목적은 영성을 체험하고 적용하고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종교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그만두고 그 자체로 독립체가 될 때, 종교는 종교의 본질적이고 주된 목적을 잘못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때 종교는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뀔 것이다.

당신은 예수를 신성한 목적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인간의 목적을 지닌 신성한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은 예수를 지구의 맥락 안에서, 그리고 인간과 관련된 것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이라는 맥락 안에서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당신이 예수를 큰 공동체 인물로 생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는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다. 그는 그의 시대에 앎을 깨닫고 공헌한 사람이었으며, 다른 많은 사람의 노력을 통해, 삶의 더 큰 주안점이 활기를 띠고, 헌신과 공헌과 봉사의 교리를 통해 이 주안점을 다시 체험하는 수단이 활기를 띠도록 도운 사람이었다.

이제 당신은 예수를 큰 공동체에 있는 불가시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더 큰 현실에 어울릴 수 없는 그런 관념과 개념, 믿음, 선호를 옆으로 제쳐 두고, 마음을 열고, 당신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도전에 직면한다. 예수가 지금 당신에게 진짜가 되고 미래에도 진짜가 되려면, 당신은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그의 현실과 그의 역할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과 일치하지만, 당신이 이에 보조를 맞추려면, 당신은 앎길에서 발전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영성을 미래로 가져가 그 영성에 뛰어난 현존과 능력을 부여할 기반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예수는 점점 삶과 동떨어져 보이는 역사 속 인물이 될 것이다. 당신은 그를 오래전 인물이나 지나간 시대의 인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와 관련된 모든 것, 앞으로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시야에서 사라질 모든 것과 함께 잊힐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앞을 보라. 수평선 너머를 보라. 무엇이 다가오는지 보라. 지나간 일은 과거이고,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 영성과 종교가 현재와 미래에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가지려면, 새로워져야 하며, 세상의 더 큰 움직임과 변하는 인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당신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처방전과 같다. 당신은 기존 처방전에서 벗어나서, 당신 눈을 다시 검사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명확히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처방전을 받아야 한다. 기존 처방전으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 종교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 종교를 매개 수단으로 생각하라. 종교를 바꿀 수 있는 구조로 생각하라. 정직하고 진실하고 유익하게, 보고 알고 행동하기 위한 처방전으로 종교를 생각하라. 이때 당신은 그 형태에 집착하지 않고 그 본질과 결속할 것이다. 본질은 형태를 초월하고, 형태에 다시 활력을 주며, 형태를 새롭게 할 것이다. 본질은 당신 삶에서, 또 당신이 봉사하러 온 세상 안에서, 형태에 새로운 관련성과 의미를 줄 것이다.

당신은 더 큰 맥락에서 예수를 생각해야 하며, 더 큰 맥락에서 신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는 틀림없이 큰 공동체의 예수일 것이고, 신은 틀림없이 큰 공동체의 신일 것이다. 그래서 큰 공동체 영성과 큰 공동체 신학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선구자는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을 가야 하고, 남들이 자각할 수 없거나 자각하지 않으려는 것을 자각해야 하며, 남들이 말할 수 없거나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 당신의 도전이고, 이것이 당신이 공헌할 좋은 기회이다. 이 현실과 이 도전을 직시하라. 그러면 당신은 예수를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예수가 직면한 것을, 어쩌면 훨씬 더 작은 방식이겠지만,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수가 체험한 것을 체험할 것이므로, 예수를 알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예수가 지금 지구에 있고, 그가 지구의 큰 공동체 출현에 유익한 역할을 할 것임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