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된 계시의 원음 듣기:
다운로드 (오른쪽 버튼 클릭)
2017년 1월 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녹음에 관하여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독자에게 알림
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엄격한 신앙이나 훈계에 얽매이지 않은 신의 체험, 종교 권위자나 교파에서 정의되지 않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종교도 세상에서 신의 뜻이나 목적, 활동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으므로, 어느 종파도 신의 체험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새로운 체험, 즉 순수하고, 활력을 주고, 끌어올려주고, 힘을 주는 새로운 신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 체험이 신에 의해 창시된 모든 진정한 종교들의 목표이지만, 분리된 이들의 손에서, 또 창조물과 떨어져 이곳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의 손에서, 신의 뜻과 목적과 활동이 경전과 훈계, 통제와 정의로 바뀌며, 정의가 다르고 처방이 다르고 훈계가 다른, 타종교들에 대한 반감으로 바뀐다.
순수하고 성스러운 것이 이 세상에서 분리되고 분산된다. 그래서 신이 이 큰 전환점에서 다시 말해야 한다. 지금은 인류가 쇠퇴하는 세상에 직면하는 큰 전환점이며,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고 한동안 죽 일어난 접촉의 현실인 우주 삶의 현실에 직면하는 큰 전환점이다.
인류는 큰 문턱에 있으며, 신에 대한 새로운 체험, 앎의 힘을 통해 직접 신에게서 오는 체험이 필요하다. 이 앎은 각자의 내면에 신이 심어놓았으며,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당신의 세상 마음 표면 아래 깊은 곳에 있는 큰 지성이고, 신에게서 받은 큰 하사품이며,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세상에서 봉사하는 큰 삶으로 당신을 인도하는, 비할 데가 없는 가치를 지닌 선물이다.
당신은 이 앎의 힘과 현존을 통해, 이 앎의 안내를 통해 신을 체험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으로, 당신은 앎의 힘과 현존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 앎이 신과 당신의 연결부이기 때문이다. 이 앎은 어느 종교도 제대로 서술할 수 없는 당신의 불멸의 부분이다. 이 앎은 인류는 물론 우주의 삶이 있는 이 큰 공동체의 어느 종족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신을 정의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신을 잃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린 신의 정의를 잘못됐다고 가르쳐주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신을 잃을 것이다. 독점권이나 특권으로 신을 붙들고 있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신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축약하는 것이나 방어적이 되는 것과 무관하며,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것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제 인류가 성숙하여 벗어나야 하는, 신에 대한 기존 정의이다. 신의 체험은 이곳에서 인류를 통합하고, 인류의 끝없는 갈등을 종식하기로 되어 있으며, 신에 의해 창시되어 인간에 의해 바뀐 세상 모든 종교들 사이 경쟁과 싸움을 종식하기로 되어 있다. 인류는 신에 대해, 또 이 세상에서 신의 뜻과 현존과 힘에 대해 참으로 조금 밖에 모른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에 대한 깊은 체험이다. 환상적인 강렬한 체험을 하거나 신성의 현존을 즐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체험하는 순간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신의 체험은 혼란의 안개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 진정한 방향이 없이 되는 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체험은 당신이 이곳에 있는 본래 목적, 신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 안에 심어놓은 본래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체험은 조용하고, 깊으며, 분명하다. 그래서 당신을 세상의 혼란에서 끌어내어 차근차근 새 삶으로 데려간다.
이 체험은 일시에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 체험은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며, 통찰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준비되면, 신이 돌아가도록 설정해놓은, 당신 내면에서 서서히 커지는 혁명이자 계시이다.
신은 숭배나 경배가 필요하지 않다. 신은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하는 것, 당신에게는 아직 미지의 것이지만, 이곳에 온 큰 목적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큰 목적은 당신의 이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 훨씬 더 깊은 곳, 발견한 이가 거의 없는 어떤 곳에 존재한다.
이 체험을 하게 되면, 당신은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 종교들의 핵심이 되는 힘과 진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또한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나 인간의 채택으로 그 종교들에 첨가된 것들, 또 권력이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첨가된 것들을 분간할 수 있다. 당신은 세상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동정심으로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안내하는 앎의 힘이 없다면, 그들이 세상에서 다른 이들의 말에 좌우되고, 투쟁과 어려움과 궁핍으로 삶을 되는대로 살면서, 헤맬 것을 당신은 이제 드디어 알기 때문이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그들은 끊임없이 자극을 찾거나 자신의 내적 위기에서 도피처를 찾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또 다른 사람들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헤맨다.
신은 답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하게, 열린 마음으로, 믿음에 구속받지 않고 신을 체험해야 한다. 또한 이성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 모르는 것들을 안다고 가정하지 않고, 내면의 깊은 앎에 기반을 두지 않은 것들을 믿지 않고, 체험해야 한다.
먼저 점차 치우는 일이 있어야 하며, 빈 곳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 삶의 큰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야 하고, 당신 삶을 이 큰 진실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전환은 많은 계단을 밟고 어떤 문턱들을 넘는 것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이 여행은 불만족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아는, 당신이 살기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아는 데서 시작하고, 세상에 있는 인간의 모든 기록물만으로는 당신이 찾고 있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삶에서 당신의 큰 목적은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창작물이며, 그 목적에 당신을 데려가 당신이 그 목적을 단계적으로 따를 수 있도록 앎이 당신 내면에 심어져 있다. 당신은 한참 뒤에까지 그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목적이 참되고 효과 있는 것이라면, 이해는 나중에 올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새로운 신을 체험하고자 한다. 그들의 종교는 메마르고, 허망하고, 공허하고, 형식적이고, 반복적이지만, 본질과 핵심이 빠져 있고, 신에 대한 새로운 이 체험에서 강조되어야 하고, 또 강조되고 있는 참된 관계가 빠져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은 새로운 체험이 아니라, 태곳적 체험이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 거론되어야 할 만큼, 그래서 체험을 방해하고 억제하고 감추는 모든 것이 새로 말끔히 치워져야 할 만큼, 극소수만이 한 체험이다.
당신은 큰 목적이 있어 세상에 파견되었다. 당신을 파견한 이들인 당신의 영적 가족은 당신이 이 어려운 세상, 혼란스럽고 타락한 이 세상,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보기 위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이 세상은 머물기에 쉬운 곳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목적이 있어 세상에 파견되었다. 그 목적은 당신 내면에 담겨 있으며, 당신을 위해 새로운 신의 체험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일단 당신이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에 연결되기 시작하고, 또 앎을 점차 알아차리게 되고, 당신 삶을 앎이 개조하고 안내하도록 허용하면, 당신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큰 힘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중대한 책임이 있으며, 아무 의미나 가치, 목적이나 방향이 없는 것들에 자신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신의 체험이다. 이 체험은 앞을 미리 내다보는 순간이나 큰 통찰을 갖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체험은 당신 삶에 출현하는 현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하여 당신이 자기의심이나 불확실성과 싸워나가면서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출현하는 현실이다. 이 체험은 어쩌면 당신의 종교 관념이나 당신이 배운 것과 맞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영향을 준 주변 사람들의 관점이나 믿음과도 맞지 않을지 모른다. 또 어쩌면 합리적 방식으로는 말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합리성이란 단순히 불확실하고 어려운 세상에 대처하기 위한 대응기제에 불과한 것 아닌가?
큰 진실은 이런 것들을 초월한다. 이성은 훌륭한 종이지만, 마스터가 될 수는 없다. 합리성은 여러모로 유용한 도구이지만, 당신 삶의 궁극적 진실은 아니다. 종교적 믿음은 당신을 도울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지만, 참되고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이 큰 체험으로 당신을 인도해야 한다.
세상은 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다. 종교적 명령과 믿음을 초월한 체험, 종교를 통제하는 세력이나 아주 많은 사람을 안내하고 조종하고 통제하는 여론을 통제하는 세력들 영향권에서 벗어난 체험이 필요하다.
이 체험은 신이 당신에게 주는 큰 선물의 일부이며, 이 선물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당신은 그 체험과는 멀리 떨어진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체험은 당신 뒤에서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려고 하면서, 세상에 매료되거나 세상을 두려워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신은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은 신과 함께 있지 않다. 새로운 신의 체험은 당신 내면에 있지만, 당신은 아직도 그 체험을 구하지 않고 있다. 이 체험은 이성이 기획하는 것이 아니다. 이 체험은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깊은 평가이다. 즉, 당신 내면의 앎이 지닌 지혜의 깊은 샘, 당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당신의 큰 부분으로 들어가는 깊은 평가이다. 당신은 이 앎을 어쩌면 여기저기에서 아주 잠깐씩 체험하거나, 어떤 것에서 당신을 제지하기도 하고 어떤 것에서는 행동하도록 몰아대는 힘을 느낄 때 체험하기도 한다.
이것이 새로운 신의 체험의 시작이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동시에 다방면에서 활동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이나 문화와 종교에서 말하는 것에 끌려가거나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아야 우리가 말하는 이 큰 자유를 얻을 것이며, 당신 삶에 있는 신의 현존과 힘을 마침내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앎을 통해 자신을 나아가게 하면서 체험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이들 안에 있는 앎을 보고 이 앎에 응답하면서, 또 자신을 안내하는 이 큰 앎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도처의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나 삶에는 오직 앎과 앎의 필요성만 있기 때문이며, 또 신의 체험과 인도가 있고, 그러고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체험에서 당신 마음이 자유롭게 된다. 의무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세속적인 권세에 굴복하는 사슬을 끊는다. 이때 당신 마음이 확장하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이제 더 큰 것들을 숙고해볼 수 있고, 당신이 삶을, 단순히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실제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신은 당신 내면에 이 힘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신은 세상을 위한 큰 계시를 통해 이 힘을 부르고 있다.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 파괴가 심화되는 세상, 남아 있는 지구 자원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국가나 그룹들 사이 큰 분쟁이 일어나는 세상에 직면하여, 도처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이 큰 전환점에서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이 시기는 큰 위험이자, 동시에 큰 기회이다.
왜냐하면 신이 도처의 사람들에게 순수한 계시를 전해주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하며, 새로운 신의 체험, 신에 대한 새로운 이 체험을 얻는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이제 다시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가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가본 것보다 더 먼 곳에 도달하므로, 앞으로 간다. 하지만 당신 내면에 본질적인 것, 즉 영속적이고 진실하고 불변한 것, 문화•정치•종교 등의 통제와 조종 너머에 있는 것으로 되돌아가므로, 뒤로 간다.
이때 종교가 당신 내면에서 살아 있는 현실이 된다. 이때 당신은 자신에게 만약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를 포용할 수 있다. 그 종교는 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의 현실과 함께 살아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신은 세상에 전해진 큰 메시지들, 인류 문명의 큰 기본 구성물들, 인간의 현실에서의 가슴과 혼, 이 세상에서의 의미와 목적을 다시 활기차게 하고, 복원하며, 새롭게 한다. 이렇게 하여 진실한 것이 다시 활력을 찾는다. 이렇게 하여 불필요하고 거짓된 것이 옆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엄격하고 극렬한 신앙에서 벗어날 만큼 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더 큰 안전이 있고, 당신 삶을 안내하는 더 큰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또 이 세상에 왜 왔는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인류가 세상 안팎에서 오는 큰 위험과 큰 도전에 맞설 수 있도록 무엇이 인류를 마침내 통합할 수 있게 하는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신이 다시 말했으며, 세상에 새 메신저를 보냈다. 이것은 또 다른 별개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신의 체험을 세상에 가져다주려고 이전에 전한 모든 것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 신의 체험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일이나 로맨스에서, 또 권력이나 부의 추구에서 찾고 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신과 다시 연결되고자 하며, 이곳에 온 그들의 큰 목적을 알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발견될 수 없는 곳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아무런 해답도 없이 무의미한 길들을 따라 여행하고 있다. 신은 그들 뒤에서 그들과 함께 서 있지만, 그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되돌아오라. 고요히 있으라. 무익한 활동들을 그만두라. 다른 모든 이들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뒤로 물러서라. 그러면 당신은 이 힘과 이 현존, 이 내적 공명을 체험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이 체험은 규정할 수 없으니, 규정하지 말라. 이 체험은 믿음보다 크니, 이 체험 밖에서 믿음을 구하지 말라. 이 체험은 다른 이들을 축복하기 위해 여기 있으니,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데 이용하지 말라. 이 체험은 당신을 회복시키고 강하게 하기 위해, 또 당신이 다른 모든 것에서 찾은 것을 당신에게 주기 위해 여기 있으니, 당신 자신을 비난하거나 과거 당신 잘못을 자책하는 데 이용하지 말라.
이 세상을 감독하는 우리가 이 계시를 전한다. 당신은 우리의 이름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분리된 삶을 살면서 숙고해볼 수 없는 현실인, 한 음성으로 말하는 다수이고 다수가 말하는 한 음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이며, 신의 뜻을 말로, 연습과 행동으로, 해명으로 번역한다. 창조물의 힘과 함께, 우리는 이것을 당신에게 전한다.
당신의 생각과 믿음 너머에 자유가 있으니,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배운 것 너머에 자유와 휴식이 있으니,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과 의심과 후회 너머에 앎의 현존이 있으니, 당신 내면에 사는 것을 탐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신은 당신에게 이렇게 할 것을 요구한다. 신은 항상 이렇게 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앎의 힘과 현존을 통해, 당신 근원과의 관계로 복귀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앎만이 이 관계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로는 이 관계가 너무 크고, 너무 광대하다.
왜냐하면 인류의 신은 동시에 우주에 있는 인류와는 전혀 다른 수많은 종족의 신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은하들, 그 은하들 너머 다른 차원에 있는 수많은 종족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가 이것을 담을 수 있겠는가? 어떤 종교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떤 종교가 그러한 것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만하다. 또한 가망 없는 탐구이며, 사람들을 억압하고 예속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세상은 지금 이럴 여유가 없으며, 끊임없이 서로 싸울 여유가 없다. 계속 서로 싸우면, 인류는 남은 지구 자원을 다 써버려, 이전에 이곳에서 겪어본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절실히 필요하고 대단히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왜 신이 다시 말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성한 힘과 현존을 새롭게 체험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체험이야말로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나 종교 밖에서 연습하는 순수한 종교이고, 인류와는 매우 다른 이들이 우주 전역에서 연습하는 순수한 종교이며, 신은 이 작은 행성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우주를 위한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적으로 연습하는 순수한 종교이다.
당신은 여기서,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나, 종교들이 추종자들을 묶어 두려고 이용하고 다른 종교를 훈계하려고 이용하는 것과 이 체험이 얼마나 다른지 대조해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이지, 신이 만든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목적과 야망에 쓰이는 종교이지, 신의 뜻이 아니다.
신의 뜻은 인류가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를 보호하고 회복하도록 도우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전혀 알지 못하는 현실인, 지금 인류를 위협하는 이 지역 우주로부터의 개입에서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돕는 것이다.
인류는 마치 배가 침수되고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배 위에서 싸우고 있는 선원과 같다. 배는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지만, 선원들은 누가 선장이 되고, 누가 선원이 될지, 누가 이끄는 사람이 되고, 누가 따르는 사람이 될지 등 통제권을 누가 가질지를 놓고 계속 싸운다.
이 배는 침수되고 있으며, 위험에 처해 있다. 인류 문명은 침수되고 있고, 위험에 처해 있으며, 벌써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국가들이 무너지고 있다. 지구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규모의 현실로, 땅이 메마르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는 미래에 전 국민이 이주할 것이다.
그런 세상에 직면하려면, 또 인류가 더 통합하고 자유를 지키고 확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봉사하려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고, 그 영감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또 내적 힘과 온전함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이 샘에서 나와야 하고,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앎에서 나와야 하며, 인류를 위해 이것을 하고자 하는 신에게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 대안은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만큼 너무나 위험이 따르므로, 이것은 지금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요 때문에 움직이며, 동시에 용기와 정직으로 움직인다.
가슴에서는 이것이 사실임을 당신이 알겠지만, 이것을 보고 알고 느끼려면, 또 당신을 내면에 있는 진실하고 영원한 것에 되돌아가도록 이끌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하려면, 당신은 자신의 사고틀에서 충분히 벗어나야 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수준에서는 혼란도 없고, 비난도 없다. 오직 베푸는 봉사만 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동정심이 있지만, 동시에 행해져야 하는 것을 실행하는 힘과 결단력이 있다.
앎은 당신 힘의 핵심이며, 당신 영감의 핵심이다. 앎은 당신이 살기로 한 삶으로 되돌아가도록 당신을 이끌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앎만이 당신을 그곳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성자나 선지자를 믿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그곳에 갈 수 없다. 당신은 따르려면, 당신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신의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