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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당신은 분리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겉보기에 당신이 다른 모든 개인과 구별되고, 각자의 정체성과 의식을 지닌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어 보이는 분리된 상태에서 한 개인으로서 살고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기본적으로 혼자이다. 당신은 자신만의 생각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세상 경험을 바탕으로 원하는 대로 상상할 수 있다. 당신에게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이동성이 있다면, 당신은 심지어 삶의 방향까지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만의 개인 마음과 생각 안에서 혼자인 듯이 보인다. 심지어 당신의 생각을 자신이 생각해낸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생각들 대부분은 당신이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서 축적하고 흡수한 것이다.
당신은 삶이 당신에게 좋아지기를 바라고 기도하지만, 재앙은 언제나 있을 수 있고, 상황은 일순간에 바뀔 수 있다. 지금 세상은 거대하고 격동적인 변화인 변화의 큰 물결을 겪고 있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에서 무엇이 다가올지, 미래에 대한 큰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있다.
혼자 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즉, 고통과 상실이 두렵고, 거부와 비판이 두려우며, 당신에게 필요하거나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봐 두렵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이상한 행동이나 부정직, 조종, 회피, 오락, 도락, 강박관념, 중독 등,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당신이 사는 세상은 분리된 이들의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있는 생명체들은 서로 경쟁하고, 서로 집어삼킨다. 사람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겉으로는 잘 지내지만, 진정한 헌신, 특히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하는 헌신은 드물고 예외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근본적인 딜레마인 분리의 딜레마를 벗어나고자 탈출과 회피를 무수히 시도했지만,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자연은 대단히 흥미롭지만, 물질 환경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편히 있기는 어렵다. 세상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적응해야 한다. 특히 당신이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세상은 복잡하다. 세상은 짜증나게 하고, 혼란스럽고, 위험하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정직하게 마주하려 한다면, 심지어 자연 자체에도 많은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연을 돌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자연은 당신을 돌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연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돌보고, 자연의 다양성과 자연의 본질적 특성들을 유지하려 하지만, 자연은 당신이 살든 죽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그저 세상 풍경의 한 부분, 일시적인 장면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냉혹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솔직한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회피와 부정직, 선호, 꿈, 환상을 옆으로 제쳐 놓는다면, 당신은 내면에서 본질적인 이런 평가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상당한 충격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갑자기 온갖 질병과 경제적 궁핍, 계속 더 커지는 상실의 가능성, 관계 문제, 건강 문제, 취업 문제,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 자체의 문제 등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이 겉보기에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신은 분리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왜냐하면 당신의 일부는 신과 분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일부는 결코 신과 분리되지 않았다. 당신의 일부는 이미 완전하게 신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의 이 일부는 이성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대개 물질 현실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정교한 지성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은 훌륭한 도구이지만, 진짜 본연의 당신은 아니다. 당신은 마음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인가? 이것은 큰 공허, 큰 신비, 큰 의문처럼 보인다.
신은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답을 주었다. 즉, 분리에서 벗어나는 길을 주었으며, 당신을 삶에서 떼어놓거나, 이곳에서의 당신 체험과 책임에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과 더 큰 동기를 가지고, 당신 삶과 체험과 책임 안에 정확히 있게 하는 길을 주었다.
우리는 신에게서 분리되지 않은 당신의 일부분을 앎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것을 앎이라고 부르는 것은 앎이 깊이 아는 당신의 능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앎은 증거 없이 알며, 이치를 따지거나 일반적인 계산을 하지 않고 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안내자이자 조언자인 앎이라는 큰 지성으로, 보고 알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바로 이 앎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신은 당신의 삶과 당신의 온갖 사소한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살필 필요가 없다. 모든 우주의 주인은 여기 와서 당신 삶을 돌보거나, 당신의 일상적인 어려움과 활동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당신 내면에 복원의 힘을 심어 놓았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의 지혜로운 일부이자,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당신의 일부이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앎은 세상에 오염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당신의 일부, 복잡하고 때로는 비효과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하게 한 당신의 일부를 안내하기 위해 여기 있다.
여기서 앎은 당신의 마음, 즉 당신의 이성, 개인 마음, 세상 마음 등 마음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안내하기로 되어 있다. 바로 이 앎이 당신을 위해 새로운 진로를 정하고, 당신 삶에 다른 종류의 관계를 가져오며,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줄 것이다.
앎은 정말 놀라운 선물이다. 앎은 진실로 위대한 하사품이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너무 바쁘고, 너무 산만하고, 자신의 생각과 일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 앎을 체험할 수도, 심지어 알아차릴 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앎을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통찰력이나 놀랄 만한 인지와 같은 직관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매우 드물고, 아주 흔치 않으며, 너무 신뢰할 수 없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실제로 그들 내면에 큰 지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어려워질수록, 또 불확실성이 커지고, 경제적·사회적 불안정이 가중되고, 세상이 변화의 큰 물결에 대응 태세를 갖출수록, 당신의 나약한 일부는 더욱 격앙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나약한 일부는 주변의 현실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큰 부정과 자기 집착에 빠지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 시기에, 앎의 힘과 현존은 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에게 앎이 필요하고, 앎이 있어야 하며, 앎의 지혜와 앎의 명확성과 앎의 온전함과 앎의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점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복원의 씨앗과 근원으로 앎을 심어 놓았다. 복원은 당신이 위대한 성자나 위대한 메신저를 믿는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복원은 심지어 당신이 신을 믿거나,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전히 세상 마음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당신이 하는 시도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며, 주변 어디에서나 보는 어려운 현실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려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하지만 진정한 복원은 당신 내면에 있는 강력한 것에 당신이 응답하므로 일어나며, 체험과 관계의 더 큰 영역에 당신 마음을 여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인식과 당신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복원은 당신이 신앙생활을 하든 안 하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복원이 신앙생활의 목적임을 당신이 이해한다면, 신앙생활은 여기서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종교나 그 종교의 내력에 상관없이, 신앙생활의 목적은 당신을 앎의 힘과 현존에 결합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나 명상, 예배, 헌신, 암송, 묵상 등 이 모든 것은 당신을 이성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는 이 큰 지성으로 데려온다. 이곳이 당신이 신과 연결되는 곳이고, 신이 당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이다.
앎은 잠재의식의 마음이 아니다. 당신은 앎을 이용하여 부나 이득을 얻거나, 사람들을 당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앎은 전혀 이와는 다르다. 잠재의식은 여전히 세상 마음이다. 잠재의식은 그저 당신이 모르고 있거나 매일 활용하지 않는 마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더 신비롭고 심오한 것,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이용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앎은 순수하므로 당신은 앎을 조종할 수 없다. 앎은 당신의 이성이나 계획, 목표, 계략보다 더 강력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앎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앎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 일인지 아는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신은 당신이 이 세계에 사는 인간이든, 아니면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지적 존재이든, 모든 세계에서 분리된 이들을 앎을 통해 복원한다. 왜냐하면 지각 있는 존재에게는 모두 앎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앎에 관해 알거나, 앎을 따르거나, 앎이 있다고 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앎은 거기에 있다.
여기서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나 무함마드나 붓다를 믿는 것으로는 당신과 당신의 근원 사이에 있는 분리의 간극을 메우지 못할 것이고, 세상에 살고 있고 세상에 속한 당신의 일부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당신의 일부 사이에 있는 분리의 간극을 메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리는 내적이기도 하고, 외적이기도 하다. 분리에서, 당신은 자신의 깊은 본성과 단절된다. 깊은 본성은 당신에게 미지의 것이고, 신비이다. 당신은 다른 이들과 단절된다. 그리고 겉보기에 자신의 근원과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분리 속에 살면서, 당신 마음의 일부인 세상 마음이, 실제로 분리가 진짜 현실이고, 사물의 본질이고, 사물의 진실이고, 실질적인 수준에서 사물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활동해야 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며,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당신은 의견 충돌과 부정직, 갈등 그리고 당신 내면과 다른 이들 내면에 있는 마음의 온갖 교묘한 책략에 대처해야 한다.
앎이 없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환상 속으로 도피할 만큼, 그리고 만약 형편이 되면, 취미와 꿈으로 도피하여 세상에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느끼고, 어떤 영속성과 일시적인 편안함을 느끼려고 할 만큼, 매우 문제가 많고, 매우 위험해지며, 매우 불운하게 된다.
신의 새 계시는 앎길을 전한다. 앎길은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다세계 큰 공동체 전역에서 배우고 있다. 이것은 우주적 가르침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나 인류 문화, 인간의 갈등, 인간의 성격으로 덧씌워지지 않는다. 앎길은 필수적이고 순수하다. 앎길은 위대한 신비주의자,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발명가, 위대한 인도주의자들이 항상 따른 길이다. 그 증거는 인류 역사와 지구에 있지만, 그것은 일상적이지 않고,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큰 앎이 일하는 증거인 다른 사람의 영감을 발견하려면, 당신은 그 증거를 찾아보아야 할 수도 있다.
정말로 정직해지려면, 당신은 자신의 곤경을 인지하고, 그 곤경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거나 조작하는 일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의 곤경은 당신이 분리 속에 사는 것이며, 자신에게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성향과 성격적인 측면을 알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을 알며, 자신의 현재 모습을 안다. 당신은 자신의 성격과 활동, 또 어쩌면 독특한 특징들까지, 그런 특질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더 깊은 본성, 진짜 본성, 영원한 본성에는 이방인이다. 당신의 일부인 그 본성은 신과 창조물을 결코 떠난 적이 없고, 지금 당신의 내면에 살고 있으며, 당신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당신 곁에 있었듯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당신 곁에 있을 것이다.
앎이 없다면 삶은 힘들고, 두렵고, 문제가 많다. 삶은 아름답지만, 또한 위험하고, 즐겁지만, 매우 고통스럽다. 당신의 이상이 좌절될 때, 또 당신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할 때, 당신에게 큰 실망이 뒤따를 것이다.
신은 이것이 당신의 고통과 불안과 장애의 근원임을 안다. 사람들은 아직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이점이 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부유한 나라에 살고, 풍요롭고, 기회가 있으며, 식량과 물과 에너지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든, 아니면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든, 상황은 여전히 똑같다. 당신의 사정은 매우 다르고, 당신의 기회도 매우 다르며, 당신이 가진 사회 권력의 정도도 매우 다르지만, 분리 속에서 겪는 곤경은 여전히 똑같다. 당신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으며, 당신을 별로 염려하지 않아 보이는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것은 가혹한 평가이지만, 이 평가에서 당신이 정말로 자신에게 정직해지므로,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큰 진실을 직시하려면, 당신은 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화가 나고 지겨울 것이며,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될 것이다. 당신은 희망의 원천과 의미를 모르고, 참된 영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므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일 극소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예술과 음악과 코미디 등 이런 온갖 것들을 즐길 여유가 있다면, 이런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은 세상을 즐기며,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도피이다. 심지어 열심히 일하고 자신이 성취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조차도 도피의 한 형태가 된다.
사람들은 5초도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매우 쫓기고 있고, 화나 있고,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삶을 두려워하고, 미래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쫓기고 있고, 처량하며, 심지어 그들이 실제로 자부심을 가지고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할 때는 더 처량하다.
천사들은 이것을 보고, “이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이 사람이 자신이 처한 삶과 상황의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점에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진실에서 더 동떨어져 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강박관념, 취미와 활동에 더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기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해결책을 주었다. 고통에 대한 해결책, 분리에 대한 해결책을 주었다. 이 해결책은 신비롭게 당신 내면에 있다. 당신은 이 해결책을 이용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당신은 줄곧 그렇게 해왔듯이, 이 해결책을 회피할 수 있고, 이 해결책에서 도망칠 수 있지만, 이 해결책은 여전히 당신 곁에 있다.
신은 당신 삶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 신은 이 세상일들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 신은 날씨와 일련의 사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초에 돌아가도록 설정되었고, 여전히 돌아가고 있으며,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계속 돌아갈 것이다.
큰 복원은 앎의 회복이다. 신은 신의 새 계시와 함께 제공된 준비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했다. 여기서 당신의 생각, 이성적 마음, 세상 마음은 연습과 인식과 적용을 통해, 당신 내면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인 앎에 연결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미 이러한 것들을 안다고 생각하거나, 당신이 매우 직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길에서 초보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미 이 산을 오르내리며 여행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이전에 이 산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정직의 문제이다. 정직은 혼자 속으로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매우 일관되고 정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단지 스스로 정한 부정직을 확산할 뿐이다. 당신 주변 세상으로 확산하면서, 남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고, 그릇된 인상을 줄 뿐이다. 비록 당신이 정직하다고 생각하고 정직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처럼 더 깊이 파악할 때까지는, 부정직은 여전히 당신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진정한 정직은 삶의 불행과 비극, 상실에서 촉발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의 이점은 이것들이 당신을 더 정직하게 만들고, 당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들과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는 이것들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은 생각이나 이론만으로는 이것들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은 이것들을 단지 생산적인 활동에만 기반을 두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의 안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안내를 받으려면, 당신은 앎에 복종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선호와 소망과 집착을 포기해야 한다. 당신이 이끌기를 고집하면, 당신은 따를 수 없다. 그러나 따르는 행위는 그 차이를 메꾸는 행위이고, 천천히 점진적으로 분리를 되돌리는 행위이다.
다른 사람과 당신의 관계가 참되고 진실한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있는지를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은 바로 정직이다. 끌림과 아름다움과 매력, 의견 일치와 사전 투자,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은 정직, 자기 정직이다.
이렇게 정직해지도록 당신에게 동기 부여하는 것은 당신이 고통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미래나 운명도 없는 의미 없는 일이나 관계에 삶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신의 경험과 시간을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당신 자신과 신에게 되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런데 아무도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행복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추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바로 실망이 당신을 되돌아오게 하고, 냉철함이 당신을 되돌아오게 하며, 당신 자신과의 화해가 당신을 되돌아오게 한다. 또한, 당신의 실수를 직시하고, 당신 시간의 손실과 삶의 손실을 직시하는 것이 당신을 되돌아오게 한다.
앎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만, 당신은 앎의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인지이다. 또한, 진정한 자기 정직의 시작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정직의 시작이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의도를 잘못 표현할 것이고, 사람들에게서 어떤 것을 얻어내려고 할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자원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며, 즐거움이나 안전, 동반자 관계나 어떤 이득을 위해 그들을 원한다. 그래서 당신은 관계의 의미나 관계에서 의미가 결여된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은 그 상황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만 본다.
이때 당신은 자신을 잘못 표현하며, 부정직하게 된다. 당신은 서로 얽혀 자신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일련의 상황에 빠지게 될 때까지, 잘못된 기대와 잘못된 연애를 하고, 잘못된 목표와 잘못된 관계를 쌓아간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내주었으며, 자신의 운명을 내던졌다. 이제 당신은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글을 벗어나는 여정은 매우 어렵고, 매우 힘들다.
당신은 앎의 필요성을 알아차려야 한다. 진짜 냉철하고 자신에게 정직한 순간에, 당신은 앎이 없다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진실한 관계와 거짓된 관계를 분별할 수 없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새롭고 더 나은 삶으로 가는 다리를 놓을 수 없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은 점진적으로 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당신은 냉철함과 자기 성찰의 순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실망과 환멸의 순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법을 배울 때, 어쩌면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깨달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앎이 그들에게 자원이 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즉 더 나은 일, 더 나은 관계, 더 나은 건강, 더 나은 기회, 더 나은 이점을 얻으려고, 또 고통은 더 적고 즐거움은 더 많이 얻으려고 앎을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앎이 자신들에게 실제로 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앎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더 깊고 더 심오한 수준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여기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자신에게 가장 절실하고 가장 깊이 필요한 것들을 인지할 만큼 충분히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점을 얻기 위해 삶에서 역할을 하고 일을 처리하려고 할 것이며, 이점을 얻기 위해 위험한 게임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 자기 삶에서 신의 안내와 힘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 만큼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신의 안내와 힘이 없다면, 비록 그들이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고, 복잡하고 만연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감하게 노력하더라도, 그들은 실제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인지의 순간에 도달하는 것은 바로 환상을 버릴 때이다. 이때 당신은 진정한 의도를 가지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은 단순히 삶을 향상하고, 유쾌하게 하며, 당신에게 이점을 주고, 자신을 더 영적으로 보이게 하는 멋진 일이 아니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실제로 당신을 구원하고, 복원하고, 회복하고, 새롭게 하고, 참된 온전함과 당신 내면에 있는 큰 권한을 주기 위해 여기 있다. 앎은, 사회적 양심이 아닌, 신이 창조한 더 깊은 양심과 당신을 연결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세상을 위한 신의 새 계시의 한 부분으로 영성을 앎의 수준에서 가르친다. 앎을 가르치는 것은 지구의 모든 종교에 존재하지만, 역사와 의례, 지적 논쟁, 사회에 대한 적응, 정부의 조작과 이용으로, 사라졌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 앎길은 꾸밈없이 전달된다. 순수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앎길은 더 이상 가리어져 있지 않으며,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앎은 신이 당신을 복원하는 방식이며, 당신 내면의 분리,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분리, 당신과 당신 근원 사이의 분리를 끝내는 방식이므로, 모든 종교는 앎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여행이다. 이것은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큰 여행이다. 이것은 자유로 가는 여행이며,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추구이고 가장 본질적인 관계이다.
앎은 당신의 주된 관계이다. 왜냐하면 앎은 신과 당신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믿음이나 열렬한 영적 수행을 통하지 않고 신과 연결된다. 당신은 신이 당신에게 행하기를 원하는 것을 따름으로써 신과 연결되며, 당신 삶을 회복하고 복원하기 위해 신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신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여행을 시작하라.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라. 당신을 인도하는 이 큰 힘과 현존이 없다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라. 여정이 길므로, 인내심을 가지라. 앎은 신비롭다. 앎은 요청한다고 해서 오지 않는다. 앎은 당신이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진실하게 안내를 요청하는 법을 배우고, 신호를 살피면서, 인내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앎의 현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자기 인식과 자기 정직에 기반을 둔다. 이것은 매우 필수적이며, 복잡하지 않다. 당신이 정직하게 이것에 접근한다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것이 가장 크고 가장 필수적인 관계이다.
왜냐하면 신은 앎을 통해 당신을 인도하고 보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앎을 통해 당신을 복원하고 회복할 것이다. 바로 이 앎을 통해 당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을 발견하고, 이 목적을 표현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그런 필수적인 관계들을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