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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7일
베트남 쩌우독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사람들은 매우 바쁘고, 대단히 흥분되어 있으며, 항상 급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일 수 없고, 마음은 안절부절못하며, 항상 무언가를 찾고, 열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신념과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왜 이러한가? 인간처럼 대단히 지적인 생명체가 왜 그토록 늘 쫓기고, 매우 불안해하며, 그토록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는가?
사람들은 영적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신에 대해 말한다. 또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심지어 인간에게 깊은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데도 이런 불안이 있는 것은 왜 그러는가?
그 답은 대부분의 사람이 추측하는 것보다 실제로 더 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분별하기 어렵다.
현존은 당신과 아주 가까이 있지만, 당신이 이 현존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면, 당신은 어디로 갈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항상 현존하면서 당신 내면에도 있고 당신 주변에도 있는 것과 어떻게 함께 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현존은 피할 수 없어 보이는데, 사람들은 아직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다. 당신은 현존이 항상 현존할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현존은 여전히 미지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종교적이고, 영감을 받고, 인도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현존은 낯선 체험이다. 만약 그들이 현존을 체험한다면, 그것은 한순간 잠깐일 뿐이다.
항상 당신 내면과 주변에 현존하는 것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면, 당신은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당신은 어디로 가서 현존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딜레마이자 신비이며, 그 답 또한 신비로워 보인다. 이것은 영적 존재가 겉보기에 매우 영적이지 않아 보이는 발현된 현실에서 사는 모순이다. 그래서 외부의 힘에 쫓기는 짐승처럼 쩔쩔매며, 살기 위해 분투하느라 달갑지 않은 상태에 있다.
분명히 가장 낙천적인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달갑지 않은 상태를 경험할 것이고, 만약 그들이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그들은 그들 내면에서 결코 훌륭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들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하지 않은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현존의 일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존은 순수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충분히 오랫동안 고요히 앉아서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할 수 있다면, 그는 현존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실제 존재 상태, 자신의 마음과 몸의 실재 상태를 느끼기 시작하고, 더 깊은 수준에서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는 현존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더 부자가 되려 하거나 인정받으려는 욕구 없이 정직하게 남에게 베풀 때, 그들은 현존을 느낀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서 영감을 받아 감동하면, 당신은 현존을 느낀다. 현존은 매우 가까이 있다. 인간 심리에서 치장을 벗겨내면, 현존이 있다.
무엇이 이 현존인가? 그리고 왜 이 현존은 항상 현존하는가? 이것은 당신 영적 가족의 현존이고, 창조물의 현존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의 근원의 현존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결코 신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물리적으로 어떤 곳에서 신을 떠나, 신이 없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지옥에도, 즉 지옥 같은 마음 상태에도 있다.
신을 피하는 것은 정말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을 피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왜 자신이 신을 피하는지도 모른 채, 신을 피하고 있다.
당신 몸이 죽어 이 삶을 떠나면, 당신이 사라져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당신은 항상 거기 있던 것을 그저 깨닫는다.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이들, 당신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장엄한 현존이 있다. 당신은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지 않았으며, 현존은 항상 거기 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현존에 저항하는가? 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현존을 피하려고 하는가? 그들은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데, 왜 고통과 투쟁의 세상 체험을 하려고 하고, 여기에 끊임없이 적응하려 하는가?
이것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그 답은 바로 체험 그 자체, 즉 이 현존을 체험하려는 욕구, 절망적인 생각과 행동을 멈추려는 의도, 세상에서 자신의 진짜 본성과 목적을 체험하려는 욕구이다.
이것은 개인 내면에서 맞이하는 전환점이다. 도망치지 않고, 또 환상의 상태,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당신은 더 이상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기꺼이 현존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치겠다고 결심한다.
당신이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존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겉모습에 가려져 있고, 당신 마음이 꾸민 것에 가려져 있으며, 당신의 상황과 삶의 초점에 가려져 있다. 마치 낙원에서 잠을 자지만, 지옥을 꿈꾸는 사람처럼, 자신이 잠든 상태에서 깨어나면 은총과 의미가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당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주 많은 것을 투자했다. 당신은 이곳에 있음으로써, 당신의 본래 상태에 거스르는 것을 매우 많이 쌓았으며, 이렇게 쌓은 것을 끝낼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겹겹이 쌓아 놓은 기만과 집착, 즉 빛이 사라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당신이 빛 위에 놓아둔 모든 것, 세상이 빛 위에 놓아둔 모든 것을 치우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말하고 있다.
마치 당신의 마음과 몸이 램프의 가리개가 된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가리개는 빛이 통과하지 못할 만큼 매우 어둡고 덧씌워져 있다. 이 빛은 세상을 비추는 대신, 당신 내면에 숨겨져 있다. 이 빛은 거의 모든 사람 안에 숨겨져 있다.
사람들이 현존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가지려 하고, 되려 하고, 하려 하는 모든 것에 현존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현존은 분리 그 자체의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이 바로 거기 있고, 창조물도 바로 거기 있다면, 또 심지어 당신이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의 영적 가족도 바로 거기 있다면, 당신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이 현실은 무엇인가? 이 현실이 얼마나 실제인가? 이 현실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의문으로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혁명, 반대되는 힘에 맞서는 일종의 혁명이 시작된다. 즉, 현존 그리고 현존에 대한 두려움, 양쪽 모두를 깨닫고 체험하려는 열망이 시작된다. 여기서 현존에 대한 두려움이란 현존이 드러낼 고통에 대한 두려움, 현존이 드러낼 불화와 갈등에 대한 두려움, 당신 삶이 공허하고 당신의 목표가 미심쩍다는 것을 알아보는 두려움이다.
그다음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즉, 당신이 신을 부정했으니, 신이 당신을 벌할 것이라는 두려움, 당신이 죄를 지었고 나빴으니, 신의 분노와 불만이 어떻게든 당신을 덮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날이 오늘이 되는 것을 당연히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리에 따라오는 모든 문제이다. 왜냐하면 분리는 창조물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조물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분리의 현실에서 살려면 창조물을 부정해야 한다. 창조물은 당신이 만지고 느끼는 이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이 현존을 체험하기 시작하면, 현존은 당신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현존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끌림이다. 물론 당신은 현존을 더 체험하고 싶어 한다. 특히, 현존이 당신을 처벌하려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당신이 알 때, 또 현존이 심판과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경이롭고 훌륭하다는 것을 알 때, 현존을 더 체험하고 싶어 한다.
물론 당신은 현존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서 다른 어떤 것이 당신에게 이런 체험을 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당신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기억이자 더 깊은 감각으로 세상에 온 큰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큰 목적은 현존의 체험 뒤에 생기고, 이것은 현존의 체험보다 우선한다.
하지만 자기 삶을 바꾸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이며, 분리에 많이 투자한 것에 거슬러 가고 자신의 두려움에 맞서는 것, 또 세상에 푹 빠지려 하고, 세상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려 하고, 세상에서 무엇인가 되려고 하고 무엇인가를 하려 하고, 가지려 하는 등, 당신을 세상으로 계속 이끄는 욕망에 맞서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이다.
여기서 당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욕주의자가 되는 특별한 부름을 받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부름이란, 실제로 그들 삶을 밝게 비추어 알려주는 것을 의미하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큰 전환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현존을 느끼거나, 적어도 현존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과 목표와 우선순위 등, 모든 것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그들이 숨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치 바위 밑에 숨고 싶어 하는 작은 생명체처럼, 죽게 될까 두려워하며 발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도 신을 이런 식으로 본다. 비록 그들이 신을 믿는다고 해도, 지금 신을 체험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을 체험하는 것은 모든 것의 종말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을 믿으며, 나중에는 신과 함께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니, 제발.” 그들은 신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신앙심이 있다고 해서 당신이 현존을 체험하거나, 당신을 이곳 지구에 오게 한 큰 목적을 체험하리라는 어떤 보장도 없다. 현존이나 큰 목적을 발견하는 일은 종교가 없거나 심지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다. 때로는 응징에 대한 믿음, 심판의 날과 지옥에 대한 믿음 때문에 종교적 믿음이 이 근본적인 발견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아무도 현존이나 큰 목적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늘이나 금방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왜 피하는지, 원래의 의문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신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고, 현존이 바로 그곳에 있으면서, 그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 그들의 모든 비행과 부도덕함과 폭력적인 생각, 그들의 모든 분노와 불만, 그들의 상상 속을 지나가는 끔찍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런 것들에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분리 속에서 당신이 창조한 당신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당신, 창조물 자체의 일부인 당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인간 딜레마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인간만의 딜레마가 아니라, 이 우주는 물론 심지어 다른 우주들까지 모든 발현된 지적 생명체의 딜레마이다.
우주에 있는 다른 종족들이 비록 당신과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분리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고, 심지어 고도의 기술을 가진 종족들까지도 그렇다. 현존은 그들과도 함께 있지만, 그들은 현존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현존을 원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는 현존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는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편안함, 안전, 즐거움, 권력, 부, 이런 모든 것들이 당신과 신의 연결고리를 빼앗고, 현존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지우고, 이 시기에 세상에 온 당신의 큰 목적을 잊게 한다면, 이런 모든 것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사물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음, 모든 사람이 간절히 원하고 갈망하는 것들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들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들에게는 성찰하는 순간들이 있다. 아마도 실망이나 환멸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성찰하는 순간들, 즉 희망적인 순간들, 재고해 보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구원자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어떤 종교에 속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존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이념에 관한 것도, 당신이 고수할지도 모르는 어떤 종교 체계에 관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온갖 잘못된 질문을 한다. 그 주안점이 모두 잘못되었다. 그들은 이것이 모두 관념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관념에 대한 충성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관념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존에 관한 것이다. 사악한 현존도, 속이는 현존도 아닌, 진짜 현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악한 현존도 있고, 속이는 현존도 있고, 어둠의 현존도 있지만, 우리는 진짜 현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진짜 현존이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면, 그 세상에 드리우는 그림자 말고 무엇이 어둠의 현존이겠는가?
만약 당신이 진짜 현존을 더 지속적으로 체험한다면, 당신에게는 세상에 큰 현존과 큰 목적이 있으며, 당신의 이전 목적과 염원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따라야 하는 큰 방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현존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재고해 볼 것을 당신에게 요구할 것이다. 당신은 부양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할 자녀들과의 관계 정도를 제외하고는 당신의 모든 관계를 재고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당신이 계시를 위해 치르는 작은 대가이다. 여기서 계시되는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작은 대가인가!
신은 현존의 힘을 계시하는 새 메시지를 세상에 보냈다. 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의 공부를 통해 길을 제공했다. 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지성인, 앎의 수준에서 당신의 영적 현실에 대한 진정한 본질을 계시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을 현존으로 데려가고, 그런 다음 세상에 온 큰 목적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큰 목적은 당신 내면 깊은 곳에 살며, 당신과 내내 함께 있었다.
우리가 현존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되돌아가면, 당신은 세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은 매우 강력하고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므로, 당신은 이곳에 있으려는 모든 욕망과 의도를 잃을 것이다.
아니다. 신은 당신이 현존을 조금만 체험하기를 바란다. 즉, 당신이 자멸적인 사고와 행동을 멈출 만큼, 깊은 현실에 당신을 결합할 만큼, 당신 삶과 상황을 직면하고 재고해보도록 당신에게 용기를 줄 만큼,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체험하여 삶에 있는 다른 무엇보다도 앎을 따르는 열망과 용기가 있을 만큼만, 현존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목적은 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먼저 당신은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과 운명을 완수해야 하며, 고통과 어려움, 혼란과 대립이 있는 세상이지만, 이제는 당신을 인도하는 큰 현실과 함께 세상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현존을 한 번 맛보고 여러 번 맛보지만, 완전히 선을 넘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을 넘으면 당신은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이 세상에 있기를 원하고, 당신은 여기 있기 위해 필요한 완벽한 앎을 지니고 있다. 즉, 분리 속에서 헤매거나, 자신을 재창조하거나, 분리를 성공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 여기서 큰 운명을 체험하고 성취하는 데 필요한 완벽한 앎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은 분리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개인적 목적이 있다. 그러나 신은 이 세상에 공헌하라는 큰 목적을 당신과 함께 보냈으며, 이 목적은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간다.
그래서 당신이 현존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당신을 이곳에 오게 한 큰 목적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이 목적 역시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간다. 하지만 당신의 딜레마는 당신 내면에 있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가리키는 당신의 우선순위와 방향감에서 자연스러운 전환과 변화를 어떻게 겪을 것인지이다.
중독의 삶에서 깨어나려면 그 삶을 포기해야 하는데도, 사람들은 기존에 투자한 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단지 기존에 투자한 것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계속 노력하더라도 거기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당신은 기존 삶을 잘 돌아가게 할 수 없다. 당신은 새 삶이 필요하다. 비록 당신이 대부분 현재 상황에 머물지라도, 여전히 새 삶이 필요하다. 새 계시는 당신에게 새 삶을 준다. 세상을 위한 신의 새 메시지는 새 삶을 준다. 당신이 세계의 큰 종교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종교들의 생각에 존재하는 많은 오류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 종교들도 당신에게 새 삶을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전혀 잘 돌아가지 않는데도 자기 삶을 계속 잘 돌아가게 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깊은 본성에 호소하며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계속 노력하지만, 그들의 깊은 본성은 다른 계획이 있다. 그들은 신을 믿으려고 하지만, 바로 그날 신이 나타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인도와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만, 인도와 구원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분리의 딜레마이다.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있는 것에 매우 근본적인 딜레마이고, 당신이 자신에 대해, 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나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겪는 혼란에 매우 근본적인 딜레마이며, 당신의 관계와 활동에 스며 있는 혼란스러운 느낌에 매우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그래서 신의 오래된 계시와 이전 계시들에서처럼, 신의 새 계시에서는 항상 신에게 복귀하는 것에 역점을 둔다. 멀리서 신을 경배하거나 단순히 믿는 것에 역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적 계시로 가는 자기 내면의 문을 여는 것에 역점을 둔다. 이 내적 계시가 현존의 체험으로 옮겨지고, 자신에게 큰 목적이 있다는 발견으로 옮겨지며, 내면의 큰 혁명을 거칠 수 있는 열망과 능력으로 옮겨진다. 이 내면의 혁명은 당신이 이 목적을 깨닫고, 따르고, 그런 다음 세상에 다시 전념하게 한다.
현존은 당신을 끌어당기겠지만, 동시에 당신을 다시 돌려보낼 것이다. 현존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 삶을 당신에게 주겠지만, 당신을 다시 돌려보낼 것이다. 신에게로 도망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세상에 온 진짜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진짜 목적을 인지하고 따를 용기를 얻으려면 신이나 현존이 필요하다. 비록 당신이 종교인이 아니고, 종교적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모두 같은 것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깊은 내적 확신, 깊은 내적 양심, 깊은 내적 동기이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태도를 뛰어넘는, 옳은 것에 대한 감각, 옳지 않은 것에 대한 깊은 감각이며, 문화나 사회나 가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세상에 오기 훨씬 전 당신 창조물 안에 형성된 깊은 양심이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하면서,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운다.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당첨 번호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며, 더 똑똑하고 능숙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 배운다.
먼저, 당신은 당신 주변에 서 있는 교사들, 당신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되는 교사들의 현존을 체험할 것이다. 그들은 물리적 영역 너머에 있으며, 당신은 그들의 현존을 체험할 것이다. 그 체험은 매우 강력하지만, 당신이 점점 더 현존을 열망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현존에 대한 더 큰 체험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당신이 처음 현존을 체험할 때, 현존은 매우 압도적이다. 마치 밤에 풍경을 밝게 비추는 번갯불과 같고, 순간적인 섬광과 같다. 잠깐 동안, 당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그러고 나서 다시 어두워진다. 당신은 순간적으로 현존을 체험했지만, 그것은 오직 순간이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직 당신에게는 실제로 그 체험을 키울 열망과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습과 의도를 통해 개발되어야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에는 많은 계단이 있으며, 이 계단에서 연습과 의도를 통해 당신을 안내하고, 현존에 대한 열망과 현존을 체험하는 역량을 키울 시간을 당신에게 준다. 그리고 이 역량은 근본적으로 관계를 체험하는 역량이다.
관계를 체험하는 당신의 역량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만약 당신의 역량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당신의 체험은 제한될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당신 삶과 직결된다. 당신이 현존을 더 많이 체험할수록,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함께 있을 수 있고, 자신과 더 많이 함께 있을 수 있으며, 더 많이 삶 속에 있을 수 있다.
당신 삶의 질에 대한 전환은 엄청나고 자연스러우며,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당신은 확신해야 한다. 또한, 신에게 이끌려야 하고, 평화와 행복, 의미, 힘, 성취 등의 가능성에 이끌려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이 어느 날 나타나서 당신 삶을 새 방향으로 바꾸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방향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다. 당신의 일부는 이것을 원하고, 일부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의 일부는 관계를 구하고, 일부는 그 관계에서 도망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은 계시의 과정을 나타낸다.
계시는 그저 대단히 놀라운 순간이 아니라, 복귀의 과정이다. 계시는 빛을 발하는 순간들도 있지만, 시간 속의 과정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잠깐 멈추어, 마음이 잠잠해지는 것을 허용하라. 깊이 호흡하라. 조용한 장소로 가라. 당신의 생각이나 계획, 목표, 문제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한쪽으로 제쳐두라. 충분히 자주 이렇게 하면, 당신은 현존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얼마 후, 현존이 그냥 드러난다. 처음에는 잠깐 슬쩍 드러나지만,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당신은 자신과 상황에 대해 보고 알아야 할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존을 더 많이 체험할 것이다.
이것이 계시의 과정이다. 세상을 위한 신의 새 메시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계시를 말한다. 새 메시지는 세상을 위한 순수한 메시지이다. 새 메시지는 정치 세력이나 권력을 좇는 이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새 메시지는 순수하고 기본적인 어떤 것이고, 모두를 위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정직하게 새 메시지에 접근하고 기꺼이 그 권고를 따른다면, 새 메시지는 당신 삶을 밝힐 수 있다. 이렇게 하려는 당신의 열망은 현존에 대한 열망이다. 이렇게 하려는 당신의 의지는 현존을 체험하고, 현존이 드러내는 모든 것을 기꺼이 체험하려는 의지이다.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두려움은 현존에 대한 당신의 두려움이다.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거부는 현존에 대한 당신의 거부이다. 당신이 이 거부에 어떤 이유를 대든 거부 그 자체에 비하면, 그 이유는 부차적이며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 계시에 준비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려할 바가 아니다. 당신이 우려할 것은 당신이 준비되었는지, 당신이 계시의 과정, 즉 밝히는 과정, 변화의 과정, 재평가의 과정, 당신 삶의 주안점이 분리에서 결합과 관계로 바뀌는 과정을 겪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이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계속 생각해야 하며,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절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현존의 일부이고, 당신을 안내하고 새 메시지를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 여기 있는 그 일부이다. 우리는 세상의 한계와 심지어 몸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는 능력을 성취한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명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신의 계획을 대변하는, 우리 같은 이들 또한 당신이 이 계시의 과정을 시작할 때 당신을 도울 것이다. 당신 삶은 당신이 앎의 안내를 받아 통제해야 하므로, 그들은 당신 삶을 지배하는 일 없이 당신을 격려할 것이다.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버려야 할 것이 매우 많아, 우리가 말하는 어떤 것도 잘못 해석될 수 있고 신의 계시에 반하여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당신에게 가져다주려면, 또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세상을 위한 신의 새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려면, 이것은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다. 이 신의 새 메시지는 인류에게 아주 위험한 시기, 큰 변화와 격동의 시기에 전해지고 있다. 신의 새 메시지는 모든 종교를 분명하게 밝히고 그 종교들 가르침의 정수를 불러내기 위해 모든 종교인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현존을 체험할 기회를 얻게 할 것이다.
현존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과 함께 있다. 현존은 당신 바로 뒤에 서 있으며, 당신 표면 마음 아래에 있다. 현존은 당신이 보고 만지는 모든 것에 있다. 하지만 가시 영역을 넘어서 이런 것들에 스며 있다. 당신은 몸의 감각을 초월한 더 깊은 감각으로 현존을 체험한다.
현존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다. 현존은 어제도 당신과 함께 있었고, 내일도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다. 당신을 부르고 당신의 복귀를 기다리며 함께 있을 것이다. 즉, 의미와 방향과 목적이 있는 삶을 당신에게 주기 위해 기다리고, 당신이 계시의 길을 선택하여 상상의 어둠에서, 또 끔찍한 삶을 살려는 것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며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이해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