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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당신은 분리 속에 살고 있다. 창조물 자체와 분리되고, 당신 근원과 분리되고, 심지어 당신의 더 깊은 본성과도 분리되어, 세상의 경험으로 형성되고 조건화된 마음인, 당신 마음의 다른 부분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자신을 몸이나 생각과 동일시한다. 당신은 자신에게 이름을 붙인다. 당신은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과 뚜렷이 다르고 겉으로 보기에도 구별된다. 당신은 분리 속에 살고 있다.
당신은 당신 삶의 환경과 세상의 상황 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봉사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세상에 왔으며, 영적 가족이 당신을 이곳에 파견했다. 그래서 분리 상태에서 사는 동안에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 근원에 연결되어 있고, 여전히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이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여전히 창조물에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본성 안에 있는 이러한 모순이 실제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바로 이 모순이 당신 삶에 가능성을 준다. 왜냐하면 당신은 큰 목적이 있어서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창안하지 않았고, 실제로 바꿀 수 없는 목적, 당신 혼의 수준에서 깊은 본성이 헌신하는 목적이 있어서 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헤맬 것이고, 물질 우주에서 한 파편이 될 것이다. 당신 삶은 당신이 관계를 맺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제외하면 본질적인 어떤 의미나 가치도 없을 것이다.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당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당신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은 상실의 두려움, 해악의 두려움, 박탈의 두려움, 파괴의 두려움을 일으키면서, 항상 당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바로 이 두려움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여, 그들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며, 또 아무리 작은 행복이라도, 그들이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이루려고 하는 그 행복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끊임없는 불안, 후회의 감정, 갈망, 충족되지 않은 것, 바로 이것들이 세상 모든 사람의 체험을 이룬다.
하지만 분리는 결코 실제로 창조되지 않았다. 당신은 자신의 근원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지옥도 저주도 없다. 단지 화해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최종 결과는 화해이다. 당신의 모순과 결정은 당신이 자기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가에 있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에게 깊은 양심, 즉 사회적 양심이 아니라,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더 깊은 지성의 일부인 천부적인 양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앎은 혼란스럽지 않고, 충돌하지 않으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앎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앎을 가리고, 앎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앎에서 당신을 멀어지게 할 수 있지만, 앎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앎은 창조물 자체의 일부인 당신의 일부이다.
바로 이 앎이 당신을 구원해줄 것이다. 앎은 신에 연결되어 있고, 이 세계와 다른 세계들 안에서 신을 섬기는 모든 이들, 그리고 물질 현실 너머에서 신을 섬기는 모든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앎은 이성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며, 당신이 자기 삶에서 체험하고, 표현하고, 적용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앎의 힘과 현실과 효능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든, 자신에게 어떤 이름표를 붙이든 관계없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세상, 이 삶에서 당신이 누구인지는 당신이 이곳에 파견되어 행하고 성취하기로 한 것이고, 당신을 화해로 이끌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과정이다.
신은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신은 세상과 온갖 사소한 일을 관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인류 역사에서 큰 전환점에 응답한다. 인류가 쇠퇴하는 세상에 직면할 때, 또 나약하고 분열된 인류를 이용하려고 우주에서 이곳에 온 종족들의 개입에 직면할 때, 인간 가족에게 있는 큰 위험을 신은 안다.
그래서 당신 목적은 당신의 화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건들, 인류에게 필요한 것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당신의 역할은 매우 구체적일 것이며,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이성으로 알아내려고 했고, 당신도 그럴지 모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성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일단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며 당신이 준비하는 데 참여할 때, 이 역할은 내적 삶의 수평선 위로 드러날 것이다.
당신의 화해는 단순히 당신을 복원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세상 자체에 독특하고 중요한 봉사를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주의 신은 당신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되는 이 기회를 헛되이 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 자신에게 한 것과 상관없이, 또 자신에게 해를 입힌 타락과 실수와 타협과 상관없이, 이 목적의 힘이 당신을 복원할 수 있다. 당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일지라도, 앎의 힘은 여전히 당신을 복원할 수 있다.
당신이 앎을 향해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당신의 화해, 즉 당신 근원과의 화해,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영적 가족과의 화해, 당신의 깊은 본성과의 화해, 당신 삶과의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에서 나오는 화해이며, 세상과 동일시되고 세상에서 헤매는 당신의 일부를 불러내는 화해이다.
당신을 화해의 길로 데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은 당신이 정말로 세상에서 길을 잃었다는 깨달음이고, 또 당신 주변의 다른 이들도 같은 상황이며 같은 장애를 가졌다는 깨달음이다. 전적으로 정직한 깨달음이자 절실히 필요한 이 깨달음은 당신의 환상을 깨뜨려서 당신이 자기 삶에 더 큰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이 화해의 시작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녀와 직계 가족 외에는 특별히 어떤 것에도 책임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이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당신은 여기서 당신이 목표를 달성했는지 아닌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그들은 당신을 큰 사랑과 존중으로 대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저주도 없다. 신은 창조물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분리 속에 사는 창조물의 작은 부분, 당신이 물질 우주라고 하는 창조물의 작은 부분을 복원할 화해의 힘이 저절로 돌아가도록 해 놓았다. 당신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도 없고, 혼자서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당연히 모른다. 중요한 것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것도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며, 정직함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내면에 이 큰 안내가 없다면, 당신의 결정이 빈약한 가정과 변하는 욕망, 순간적인 끌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혹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을 두어 나약할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때 말고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당신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매우 만연해 있다.
이 두려움이 지속되면, 두려움은 사람들의 인식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들은 그 두려움을 그저 정상으로 생각한다. 정상적인 불안, 정상적인 무능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표현할 때, “글쎄, 그것은 그냥 정상이야”라고 말한다. 그저 두려움과 걱정의 정상 상태, 기진맥진과 혼란의 정상 상태이다. 사람들은 비참한 상황에 적응했고, 이것을 정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 당신의 참된 본성의 수준인 앎의 수준에서는, 이것은 별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이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당신 나이와 처지에 상관없이, 또 당신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미혼이든 기혼이든,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 아니면 아무 종교도 없든 상관없이, 이것은 당신 삶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어느 국가, 어느 문화이든, 당신 정부의 정파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이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당신이 인간이든 아니면 다른 세계의 다른 종족에 속하든 마찬가지이며, 똑같은 딜레마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분리 그 자체의 상태이다.
당신 마음은 분리를 성공적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당신 마음은 행복하고 부유하고 만족하려고 하며, 행복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는 모든 물건과 사람을 모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이 모을수록, 모은 것을 잃어버릴까 더욱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고 당신이 모은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당신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엄청난 비용과 대가를 들여 분리를 성공적이고 즐겁고, 만족스럽고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정말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침내 당신이 큰 힘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대단히 겸손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큰 힘이란 정부의 힘이나 공동체의 힘, 종교에 소속된 힘, 가족의 힘, 세상에 있는 어떤 힘이 아니라, 창조주의 힘이다. 비록 당신이 종교적으로 사고하거나 연상하지 않더라도, 이 힘은 여전히 똑같은 것이다. 당신은 이 힘을 그저 다르게 표현할 뿐이며, 그것이 전부이다.
삶은 이런 식으로, 당신을 실망하게 하는 것으로 당신에게 봉사할 수 있고, 당신 내면의 진실한 평가로 당신을 데려가는 것으로 당신에게 봉사할 수 있으며, 이것이 화해의 시작이다. 만약 일어날 더 큰 문제들에 당신이 실제로 답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자신이 큰 힘을 어떻게 규정하든, 큰 근원인 큰 힘에 의지해야 한다. 비록 당신의 규정이 처음에는 불완전하고 심지어 어리석을지 몰라도, 그것은 더 큰 연상의 시작이다.
신은 당신이 어떤 종교의 일원으로 있든 개의하지 않는다. 신은 어떤 종교의 신학에도 애착이 없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 삶의 전환에, 또 당신이 가슴을 여는 것에 응답할 것이며, 혼에 새로 필요한 것, 화해의 수단으로서 당신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인, 당신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에 응답할 것이다.
이때 세상에서 하는 봉사는 처벌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당신의 인식 속에 드러나도록 허용하고,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힘이 될 수 있게 허용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형량을 채우기 위해 밖에 나가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죄수인 것처럼, 속죄하라고 당신을 세상에 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이 하는 봉사는 당신을 위해 화해를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이들을 위해 화해를 육성하고 기르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은 당신을 보살피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비록 지구는 당신 존재에 무관심해 보여도 지구를 돌보는 것과 같이 사심 없이 베푸는 것 말고, 무엇이 세상에 신이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겠는가? 이것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창조주의 증거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고, 사람들의 가슴을 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자신의 더 깊은 양심에 연결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자신 역시 큰 연결이 있고, 세상에 있는 것에 큰 책임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화해시킬 수 없다. 이것은 이성의 추구가 아니다. 당신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신념 체계를 세울 수 있지만, 그것은 화해가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있고, 여전히 자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여전히 단절되어 있다. 당신은 믿음과 가정에 지배받고, 실제로 아직도 큰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여행이다. 당신이 이 여행을 창안하지 않는다. 이 여행은 당신이 훌륭한 것으로 여기는 다른 종교 사상이나 영적 사상들을 짜깁기한 결과물이 아니며, 거창한 철학이나 이념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 여행은 당신 삶을 움직이고 더 깊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더 천부적이고, 더 진실한 어떤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을 위한 창조주의 큰 끌어당김의 시작이다. 일단 당신이 화해를 향해 계단을 밟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아주 간헐적으로 큰 끌어당김을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은 당신의 근원으로 당신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큰 끌어당김에서 나온다.
이것은 지옥과 저주로 당신을 위협하여 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단지 물리적 장소로만 상상할 수 있는 천국을 당신에게 약속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쁨이나 황홀경, 성취의 큰 약속을 하는 것으로 당신을 끌어들여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 마음의 수준에서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할지 모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끌어당김은 끌어당김이다.
이것은 스스로 끌어당김을 만들어내면서 당신 내면에서 활동하는 큰 사랑이다. 이것은 당신이 큰 목적과 운명을 함께할 특정 사람들에게 느낄 큰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신을 내주는 열광적이고 낭만적인 것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화해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당신이 창출하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 근원과 당신을 화해하게 할 것이고, 당신과 함께 있는 다른 이들에게 진정으로 영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위해 유익한 것들을 창출하는 것은 가치 있고 대단히 훌륭하지만, 심지어 이것을 능가하여, 세상에 당신의 현존이 있고, 당신을 안내하는 것의 힘이 있으며, 당신을 안내하는 것의 의미가 있다.
이것이 당신에게 놀라운 용기를 주는 것이고, 당신에게 놀라운 끈기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거짓인 것과 진실한 것, 보기에만 좋은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명료함을 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다른 이와의 진정한 연합과 한순간의 열정이나 욕망 사이에 있는 차이를 구별한다.
신은 이 세계와 모든 세계에서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복원한다. 당신은 이것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으며,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간단한 공식 같은 것으로 바꿀 수 없어도 괜찮다. 신이 실제로 하는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신이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없고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삶에 있는 온갖 사소한 것을 신이 관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창조주의 권능과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 삶에 있는 온갖 사소한 것을 관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 삶에 있는 온갖 사소한 것을 관리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신은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신은 세상을 구하라고 당신을 이곳에 파견했다. 작지만 필수적인 역할이 당신에게 있다. 만약 당신이 이 역할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두워지고, 그 전망도 불투명해질 것이다.
당신은 이런 책임과 책무에서 도망가서는 안 된다. 이 책무는 당신을 복원하고, 당신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의 일부이지만, 당신은 그 책무를 협상할 수 없다. 당신 삶의 상황은 당신이 여기서 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일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어떠하든, 합의와 약속은 여전히 똑같다.
신과 연결된 당신의 일부는 신과 여전히 분리된 당신의 일부에 지배받거나 이용될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앎을 이용할 수 없다. 당신은 오로지 앎을 따를 수만 있고, 앎이 당신을 더 큰 성취와 더 큰 화해로 데려가도록 허용할 수만 있다.
진실로 창의적이고 관대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찬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엄청난 규모뿐만 아니라 소박한 규모로도 사심 없이 베푸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당신이 찬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참된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봉사가 바로 이것이고, 진실한 시민이 자기 지역 사회를 위해 제공하는 봉사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큰 원동력이다. 이것은 다른 이기적인 추구와 혼동될 수도 있고, 그런 경우가 많지만, 일단 당신이 거짓된 것을 제거하고 나면, 화해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거나, 자신이 구하는 것을 찾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표면 마음 아래, 내면 깊은 곳에서, 그들은 화해를 찾고 있다.
화해를 찾는 것은 이 세상 이전의 당신 삶과 당신을 연결하고, 다가오는 삶과 당신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연결하고, 당신에게 온전함을 부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정상 생활이라고 하는 끔찍한 갈등과 혼란을 끝내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가장 깊은 본성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침내 당신이 깊은 본성을 인지하고 이 본성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에서 당신에게 다른 여행을 줄 것이고, 당신이 다른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는 관계의 질을 당신 삶에 가져다줄 것이다. 이것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당신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큰 봉사와 큰 책임을 제공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때 당신에게는 하늘의 힘과 현존을 잠깐 느끼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잠깐 느끼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은 자신만의 두려움과 나태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나약함과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는 큰 힘, 앎의 힘과 현존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기능하는 사람으로 있어야 한다.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고, 이런 일의 대부분은 늘어날 것이고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동기와 인식을 가지고 더 큰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세상 준비이다.
신은 분리된 이들이 응답하도록 부르고 있으며, 그들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큰 목적과 큰 방향, 큰 힘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오게 하려고 부르고 있다.
당신은 봉사하도록 이곳에 파견되었지만, 화해를 체험하기 위해서도 이곳에 파견되었다. 당신이 이곳에 있지 않으면, 화해를 느끼기가 쉽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고 분명하며, 당신의 의문이 사그라진다. 또한, 관계는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나 있다.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도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에 나오면, 당신은 이것을 잃게 되고, 보지 못하며, 무지하고, 취약하다. 화해는 바로 이 수준에서 일어나야 한다. 당신은 상상 속의 천국이 어떤 모습이든, 천국으로 달려갈 수 없으며, 당신이 착한 사람이면, 천국에 가게 될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당신이 잘하면, 당신은 더 큰 봉사를 맡는다. 이 세상을 벗어나면, 당신은 뒤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한다. 신은 당신의 성취를 헛되이 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방식으로 쓸 것이다.
일단 당신이 화해를 얻고 나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화해를 장려하고 다른 이들의 화해를 지지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은 가슴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열망이다. 당신은 마치 모종의 부를 쥐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화해를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화해는 당신을 통해 흘러나와야 하는 어떤 것이며, 또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신의 새 계시는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만, 이것은 세계의 모든 큰 종교에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 안에서 이러한 진실들은 모호해졌고, 믿음과 화려한 의식, 역사, 오역으로 가려졌다. 그래서 이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위한 신의 계시가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이것들을 명확히 해야 하고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이 큰 목적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 또 큰 화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깨닫기 시작할 수 있다. 이 큰 화해는 당신 삶에서 일어나야 하며,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당신 가슴과 혼에 더 절실히 필요한 것에 응답하기 시작할 때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