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당신 관계들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다른 무엇보다 당신의 가장 주된 관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관계는 모든 수준에서 당신의 다른 모든 관계에 더 큰 맥락을 제공하는 유일한 관계이며, 당신의 첫 안식처이자 마지막 안식처인 유일한 관계이다. 그리고 세상에 당신이 있는 목적을 세우고 당신의 성장과 발전의 가치를 정하는 유일한 관계이며, 삶에서 당신이 공헌하는 모든 것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유일한 관계이다. 이것은 당신의 안녕에도 가장 필수적이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에도 가장 필수적인 관계이다. 그런데도 당신이 주의를 가장 기울이지 않는 관계일 수 있고, 관심을 가장 갖지 않는 관계일 수 있다. 실제로 당신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신과 당신의 관계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모든 관계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은 모든 관계가 궁극점에 도달한 상태이다. 이것은 가치 있는 정의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정의하면 당신은 신을 당신 삶에서 살아있는 힘으로 체험할 수 있으며, 절대 원리로 느끼거나, 당신의 영역과 세상 삶을 완전히 초월한 현실에 있는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관계 하나하나의 맥락에서 체험될 수 있다. 즉, 당신 자신과 당신의 관계, 당신의 몸이나 마음과 당신의 관계, 다른 이들과 당신의 관계, 자연 및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당신의 관계, 세상 그 자체와 당신의 관계, 당신 주변 우주의 다세계 큰 공동체와 당신의 관계에서 체험될 수 있다.
신과 당신의 관계에 다가가려면, 세상에 당신이 온 목적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매우 직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과 당신의 관계는 당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세상에 왔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하며, 신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어떤 가치 있는 탐구를 하려면, 이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당신은 신과 관계가 있으며, 당신이 세상에 왔으므로, 어떤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
여기서 신은 매우 위대하고 매우 포괄적으로 여겨져야 하며, 세상에서 겪는 평범한 체험, 일상적인 일과 상호 작용의 평범한 체험을 훨씬 뛰어넘어 확대되어야 한다. 여기서 신은 하나의 대상이나 단일 존재로 인식되기보다는, 당신이 하는 모든 체험의 맥락으로 인식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신은 당신이 활동하는 환경이다. 여기서 환경은 정신 환경과 영적 환경이지만, 당신의 물질 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신은 환경 그 이상이다. 신에게는 마음과 뜻과 목적이 있다. 당신은 지금 전체적으로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의 마음과 뜻과 목적에서 떨어져서 그것들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그것들과 합류할 수만 있고, 그것들과 합류할 수 있는 만큼만, 그것들의 현실과 가치를 체험할 것이고, 그것들이 당신 삶에서 당장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신은 크고 세상은 작기에, 신과 당신의 관계는 반드시 당신의 목적이 언급되어야 한다. 당신이 신과 관계를 맺었다면, 왜 세상에 왔는가? 갈등과 분리가 매우 지배적으로 보이는 장소에 당신이 왜 오게 되었을까? 당신은 신에게 죄를 지었는가? 신이 신의 현실이라는 평화롭고 완벽한 곳에서 당신을 쫓아냈는가? 당신은 유배 중인가? 버림받은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면 신을 거역하고서 다른 환경에서 안식처를 찾았는가?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현실과 자기 삶의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물어야 하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그렇지만 이 질문들에 대한 진정한 답은 이곳에서 당신이 목적을 성취할 때만 충족될 수 있다. 그제서야 당신은 신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을 보고, 체험하고,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매우 단순하지만, 당신이 이것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당신은 이 전망점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 당신에게 멀어 보이고 혼란스럽게 보일 것이다.
여기서 주안점은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신과 당신의 관계, 당신 자신과 당신의 관계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그 전망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전망점에서 모든 것의 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큰 산을 오르는 것처럼, 당신은 그 산 주변 모든 것과 그 산의 관계가 자명해 보이는 어떤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이 전망점에서, 당신은 당신 삶의 전체적 의미를 왜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알 것이다. 이전에는 당신이 어떤 발전 단계에 몰두했고,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발전 단계뿐이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훨씬 아래에 있는 길을 볼 때, 당신은 “그래, 저 아래에 있는 전망점에서 보면,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눈앞의 길과 상황뿐이겠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그 길에서 당신은 산길과 정상으로 가는 길을 모두 잃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이렇게 높은 전망점에 도달하면, 당신의 관점은 더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당신은 답이 자명해지는 전망점에 도달해야 한다.
삶에서 신은 보통 가장 마지막에 진지하게 고려하는 관계이다. 진정한 의미와 목적과 가치가 자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장의 욕구와 선호와 이해에 기반을 두고 맺은 관계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대신하는 대체물들이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맺은 관계들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이해하기 매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진실이 없다면, 진실을 대신하는 대체물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진실 그 자체에 다가가고, 진실 그 자체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진실의 대체물들을 옆으로 제쳐 놓거나,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신과 당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신은 당신에게 누구인가? 당신은 신에게 누구인가? 이 질문들은 중요하지만, 당신은 지금 부분적으로만 답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적인 답은 당신이 확실성과 힘을 지니고 나아가도록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줄 것이며, 당신이 이곳에서 높은 목적에 봉사할 때, 당신의 관계들이 축복받고 공을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이 그 관계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준을 제공할 것이다.
당신은 신이 실재하는 곳에서 신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왔다. 당신은 삶이 배어 있고 내재한 마음 상태에서 삶이 분리되고 따로 떨어져 보이는 곳으로 왔다. 당신은 평화와 조화가 있는 곳에서 갈등과 불화가 있는 곳으로 왔다. 당신은 완전히 수용하는 곳에서 분리와 경쟁과 공격 등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렇다면 당신이 세상이라는 곳에 있는데, 어떻게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이것은 삶의 큰 역설 중 하나이며,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장 주된 관계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막는 역설이다. 세상이 진실로 존재하면, 어떻게 신이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보는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어리석거나 잔인하거나 힘과 능력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신이 어리석다면 신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고, 신이 잔인하다면 신은 당신이 저지른 어떤 실수나 결함에 대해 당신을 벌하고자 할 것이다. 만약 신에게 한계가 있다면, 신은 자신의 힘과 가치를 확인하려고 세상을 이용할 것이다. 신이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는 것은 분명히 나약함의 표시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보는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고 당신이 믿으면, 신이 어리석거나 잔인하거나 신의 힘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고 당신은 결국 받아들이거나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신은 분명히 당신이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거나, 헌신하거나 완전히 공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신이 어리석다면, 당신은 신의 잘못을 함께 질 것이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잔인하다면, 신은 당신을 벌할 것이고, 만약 신의 힘이 제한되어 있다면, 당신은 이로운 방식으로 당신과 세상을 도우려는 신을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신학적 의문들이지만, 이 의문들은 당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당신의 감각을 결정하는 데 필수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당신이 보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누가 창조했는가? 만약 당신이 보는 세상이 신의 현실을 뒷받침하지 않으며,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이 신의 마음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도대체 세상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신이 조물주이고 삶의 근원이자 의미인데, 신이 어떤 것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이 실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과 당신의 관계를 체험하려면, 당신은 자신이 실재하는 곳을 떠나 실재하는 것이 잊혀지고 거부되는 곳에 그 실재하는 것을 구축하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당신의 목적이다. 신은 당신이 이 일을 해내도록 당신의 영적 힘인, 앎을 당신에게 주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고향을 떠나, 고향과 떨어져 있는 이곳에 당신의 고향을 세우기 위해 왔다.
그러면 이것은 당신이 지구에 천국을 세우겠다는 의미인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지구는 천국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세상에 있는 동안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 세상은 계속해서 물리적 장소로 있을 것이다. 즉, 성장과 변화와 쇠퇴가 있는 장소, 환경이 변하고 세력들이 대립하는 장소로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이 당신의 고향이라고 믿으면서 세상을 잘못 표현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에 대한 영적 개념을 지지하기 위해 세상 현실을 무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계속 세상으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체험할 수는 있다. 그리고 당신이 이곳에서 성취와 행복과 공헌을 찾으려면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체험해야 한다.
이것을 더 자세히 탐구해 보겠다. 당신은 아무런 의문이 없고 답이 완전히 체험되는 절대적 현실이 있는 곳에서 무수한 의문만 있고 명백한 답은 전혀 없어 진정한 체험의 기반이 전혀 없는 곳으로 왔다. 왜냐하면 오직 현실만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고, 현실을 대신하는 것은 무엇이든 오직 일정 기간만 받아들이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일정 기간만 경험할 수 있으며,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일정 기간만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당신의 수명이 한정되어 있다. 당신이 세상을 영구히 경험하려면, 세상은 당신이 온 고향과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은 당신이 현재 경험하는 세상이 아닐 것이고, 당신이 현재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런 세상은 전혀 세상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주안점은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경험을 세상에 가져와 세상이 진화하고 더 진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특정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과 당신의 고향 사이의 분리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고향은 당신이 사는 곳이고, 세상은 당신이 일하러 온 곳이다. 당신은 일하러 세상에 왔다. 신은 당신을 파견했고, 당신은 스스로 왔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여기 있는 데 필요한 완벽한 앎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과 신이 거래했거나,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당신에게 하도록 신이 강요했거나, 신이 원하지 않은 어떤 일을 당신이 한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앎에는 아무런 불화도 없으며 어떠한 반대 세력도 없다. 오직 진짜인 것만 있으며, 해야 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만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고향에서 일하는 곳으로 왔다. 당신이 세상에서 하는 일에는 두 영역이 있다. 하나는 관계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르게 체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당신이 구체적으로 공헌하는 것이다. 첫 번째를 하지 못하면, 두 번째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관계에 대한 당신의 체험은 삶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공헌을 완전히 인지하거나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당신이 하지 못한 공헌은 당신에게 큰 부담과 짐이 되며,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가 될 것이다. 관계와 높은 목적에 대한 이 가르침이 당신에게 전해지고 있으니, 당신이 맺은 관계들의 참된 본성과 목적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세상에서 자신의 공헌을 발견하여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다.
관계는 삶 자체이고, 모든 것은 관계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보면, 당신은 자신이 가장 잘 나아갈 방법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 당신은 세상에서 행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선택권이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당신은 선택권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성공하려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자기 일들을 관리할 힘이 생긴다. 그런데도 당신은 자신을 인도하고 준비시키도록 당신 삶의 큰 권한을 신에게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신과 당신의 관계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이곳에 온 자신의 목적을 발견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신을 체험한다.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에 봉사하지 못하면, 당신은 자신과의 관계,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신과의 관계에서 깊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세상에 왔다. 세상은 일을 해야 하는 곳이기에 신은 당신이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이 세상에 온 진정한 이유는 당신이 고향에서 한 경험을 이곳에 다시 세우고, 당신이 와서 공헌하려고 한 그 구체적인 선물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성으로는 신과 당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이 관계는 체험해야 한다. 이 체험의 깊이는 이 체험을 바라는 열망과 받아들이는 역량에 달려 있다. 열망과 역량, 이것이 모든 사람과 당신의 관계, 모든 것과 당신의 관계에서 당신이 체험하는 범위를 결정한다. 사실은, 이 두 기준이 당신 체험의 범위와 기간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앎을 바라는 열망을 키우고 함양하며, 앎을 체험하는 역량을 확장할 때, 당신이 성장하고 진보한다.
신과 당신의 관계를 살펴보기 시작하려면, 당신은 먼저 지금 당신이 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매우 정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거나 신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저 희망일 뿐이고, 아직 확실성과 확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므로, 단순히 당신의 불신과 불확실성, 회피와 죄책감을 가릴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과 당신의 관계가 현실적이 되고 건강해지고 활기차기 위해 당신이 드러내야 하는 것을 숨긴다.
이제 당신은 신과 당신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가? 신은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는가? 신은 사랑할 만하고, 믿을 만한가? 나는 사랑할 만하고, 믿을 만한가? 나는 신과 함께할 만한가? 신은 나와 함께할 만한가? 나는 내 삶에서 일어난 일로 신을 원망했는가?”라고 자문해보라. 이것을 깊이 살펴보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또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에 친밀감을 느끼는 경험은 신을 체험하려는 열망과 체험하는 역량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친밀감을 경험하는 능력 말고 무엇이 진정한 친밀감인가? 당신의 삶과 마음을 다른 사람과 결합하는 능력 말고 무엇이 친밀감인가? 결혼이나 사업에서 성공하고, 개인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모두 신을 체험하는 것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과 함께 가더라도, 신과 함께 가는 것보다 더 멀리 갈 수는 없다. 만약 당신이 이상주의나 희망 사항에 가려 신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이나 세상과 당신의 관계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신에 대한 당신의 신뢰가 부분적이거나 전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나 삶에 대한 당신의 신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에 대한 당신의 애정이 세상에 대한 비난으로 막힌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그들 행동에 대한 당신의 비난으로 막힐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다른 어떤 관계를 깊이 생각하기 전에 신과 당신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신이 당신의 주된 관계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된 관계를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과 이미 분리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관계는 적어도 두 당사자가 있다고 가정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관계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 만약 당신이 하나의 마음, 하나의 목표, 하나의 방향을 가진 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관계에 누가 있는가? 관찰자와 당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관계가 있으면, 적어도 두 측면이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면, 당신은 이미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 당신이 있고, 또 당신 자신이 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이고, 당신이 아닌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당신이 아닌 자아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며, 신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당신의 진화 과정에서 당신이 속한 발전 단계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세상의 상태 때문이다. 세상의 상태는 당신이 별개의 의식을 가지고, 별개의 가치관 등을 가진 분리된 개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자신과의 관계가 당신의 주된 관계라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신과 당신의 관계가 없다면, 당신은 자신을 이해할 실질적 기반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마음에 들면 자신을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신을 싫어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믿을 만하면, 자신을 믿을 것이고, 자신이 믿을 만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전적으로 당신의 관념에 기반을 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관념이 관계의 기준이 될 것이다. 심지어 당신의 행동보다 더 큰 기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관념이나 결론뿐이며, 결론 역시 관념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신 자신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내린 당신의 모든 평가는 관념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신과 당신의 관계는 관념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친밀감과 목적에 대한 체험에 기반을 둔다. 당신에게는 세상에 온 목적이 있다. 신은 당신이 무엇을 하기를 바란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다. 당신의 진짜 뜻을 깨달을 때, 당신은 신이 당신에게 바라는 뜻을 깨닫게 된다. 당신이 어떻게 신을 섬길 수 있는지 알려면, 당신은 자기 힘의 범위를 인지해야 하고, 신의 힘의 범위는 당신이 가진 힘의 범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자신이 신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 신이 당신을 어떻게 돕는지 깨닫기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분리라는 개념에 정곡을 찌르는데, 이 분리는 주로 힘의 경쟁이다. 그래서 관계와 높은 목적의 이 가르침은 힘의 문제를 다룬다. 영성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이 힘의 문제에 관해서 충돌하며, 종종 이 문제를 전혀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이나 행복, 성취에 대한 생각을 더 논의하고 싶어 하지, 힘의 문제는 피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신에게서 단절되는 것은 주로 힘의 경쟁에 관한 문제이다. 당신의 개인적 힘이 신의 힘과 결합할지, 아니면 신의 힘에서 분리될지는 당신이 자신이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신뢰와 결합을 체험할지, 아니면 미움과 불신과 단절을 체험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당신이 신을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신에게 이롭다. 신이 육신도 물체도 아닌 것은 당신에게 이롭다. 당신은 육신과 물체를 판단하고, 그것들과 자신을 단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의 현존을 판단하고 신의 현존과 자신을 단절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당신은 육신이나 물체를 향해 나아갈 수도, 멀어질 수도 있고, 그것들에 이미지를 투영할 수도 있다. 육신과 물체는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어, 연약하거나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당신은 그것들을 비난할 수 있다. 육신과 물체는 당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그 결과, 현존에 친밀감을 느끼고 진짜 관계를 체험하기보다 육신이나 물체에 친밀감을 느끼고 진짜 관계를 체험하기가 더 어렵다. 당신이 현존에 이미지나 판단을 투영하면, 어디에 투영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당신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물질, 세상, 우주에 공감하기보다 신에 훨씬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은 현존이므로, 당신은 훨씬 더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신과의 친밀함을 체험할 수 있다.
신은 여기저기 모든 곳에 있으며, 당신을 감싸고 포용하며, 당신에게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준다. 신은 물체가 아니므로 당신은 전혀 신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신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은 신의 대체물을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에 있으려면 목적과 의미와 방향에 대한 어떤 의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당신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이 아니라면, 당신은 자신만의 대체물을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체물을 신으로 삼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삶에서 어떤 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체물들 가운데 일부는 해가 없어 보이고, 일부는 분명히 파괴적이지만, 모두 당신에게서 진정한 관계를 빼앗고, 모두 당신에게서 삶의 참된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빼앗는다. 왜냐하면 대체물은 이것들을 진정으로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물은 단지 이것들을 대신할 수만 있다. 대체물은 삶이 당신에게 주는 것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삶이 당신에게 주는 것을 흉내만 낼 수 있고, 오직 당신을 일시적으로만 자극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궁극적으로 당신은 오직 신과 관계를 맺거나, 아니면 당신 관념과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 왜냐하면 모든 대체물은 관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당신이 이러한 대체물을 지지하고, 강화하고, 다시 체험하려고 시도하는 데 삶을 바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그저 마음에서 집착하는 관념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포기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은 그들의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체성과 확신과 안정감의 기반이 그들의 관념에 있기 때문이다.
신과 당신의 관계를 체험하려면, 당신은 자신이 창조했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신의 대체물들을 옆으로 제쳐 놓기 시작해야 한다. 신은 친밀감에 대한 순수한 체험이므로 관계에 대한 순수한 체험이다. 이것은 공유된 힘에 대한 순수한 체험이고, 당신 삶의 올바른 지휘 체계에 대한 순수한 체험이며, 사랑과 포함에 대한 순수한 체험이다. 만약 이 관계를 바라는 열망이 강해지고, 이 관계를 체험하는 역량이 점차 확장되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과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신과의 이 친밀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과 당신의 관계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부정되면, 당신은 오직 당신의 관념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관념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과의 관계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고, 자신의 관념에 맞추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고난과 불화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삶은 당신 관념에 구속받지 않고 존재하며, 다른 이들도 당신 관념에 구속받지 않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이들을 당신 관념에 맞추려고 하면, 당신은 그들을 가두려고 할 것이고, 당신도 그들과 함께 죄수가 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신에게 갖는 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순수한 본질이고 체험이다. 당신은 어디에서나, 누구와 함께 있든, 어떤 상황에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다. 사실, 당신이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물체에서 어떤 진정한 기쁨을 얻든, 그것은 신을 체험하므로 얻는다. 당신은 그 체험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진정한 행복은 항상 신과 당신의 관계를 당신이 체험하는 것을 반영한다.
당신은 신을 체험하기 위해 종교인이 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종교를 가질 필요도 없다. 만약 당신이 참된 친밀감과 포함과 행복을 체험한다면, 신을 체험한다. 이때 당신은 신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교회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신을 체험한다. 당신은 종교 체험을 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종교 기관의 목적은 신을 체험하려는 열망과 체험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약 신이 단순히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당신이 알 수 있다면, 당신은 신과 당신의 관계와 다른 이들과 당신의 관계 사이가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신과 당신의 관계를 통해 다른 이들과 참된 방식으로 관계 맺을 수 있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헌신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신과 공유하는 힘을 체험함으로써 다른 이들과 당신의 힘을 공유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은 신의 사랑을 체험하는 역량이 다른 이들과의 사랑을 체험하는 역량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이 처음부터 신과 당신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당신은 신을 신비로운 채로 두고, 규정하지 않은 채로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에는 형태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이 규정한 것을 진정으로 숭배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이 규정한 것을 좋아하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분명 경외심은 규정할 수 없는 것, 신비로운 것에 항상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구체적인 것을 믿고 그것에 헌신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것을 참으로 경외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신을 구체화하려는 시도이며, 신을 자기 관념에 맞추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이 시도는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나 다른 이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당신이 체험할 수 없게 한다. 신과 당신의 진정한 관계는 영원히 규정할 수 없으며, 신비롭다. 성장과 영적 진보의 궁극적 목표는 신과 당신의 관계를 체험하려는 열망과 체험하는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다.
신과 당신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구축되어 있다. 당신은 세상에 있는 동안 이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에는 앎의 회복이 포함되며, 앎의 회복에는 신과 당신의 관계에 대한 체험이 포함된다.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 당신에게 희망이 있을 때만 희망이 있다. 세상이 치유를 경험할 것인가? 당신이 치유를 경험할 수 있을 때만 경험할 것이다. 당신의 가장 주된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치유인가? 이것 말고 다른 참된 치유는 없다.
참된 치유는 서로 단절된 두 대상이 서로 의미 있는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의미 있는 관계는 목적이 있는 관계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세상은 행동하는 곳이고, 당신의 고향은 존재하는 곳이다. 세상은 일하는 곳이므로 행동하는 곳이다. 일은 맡은 일을 완수하는 것이 포함된다. 당신의 고향은 영원한 곳이고, 세상은 일시적인 곳이다. 당신의 고향은 평화로운 곳이고, 세상은 행동하는 곳이다.
신과 당신의 관계는 치유되어야 하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 삶에서 주된 갈등이기 때문이다. 신과 단절된 것이 당신의 모든 갈등과 무능력의 근원이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갈등의 해결은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문제는 신과의 관계이지만, 해결책은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마련될 것이다. 진정한 치유는 이 세 가지 영역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이 이것을 할 수 있는 힘은 신에게서 받는다.
신은 보이지 않으므로, 당신이 신과의 친밀감을 체험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자신을 단지 하나의 물체나 육신으로만 여긴다면, 당신은 다른 물체와 육신에만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자신을 현존의 일부로 체험한다면, 그때 당신은 다른 이들의 현존을 인지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치유 과정의 일부이다.
모든 관계의 기반은 목적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입은 옷과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그 옷은 목적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는 집과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그 집은 목적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해 보일지라도,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적용된 것을 보기 시작하면, 이것은 혁명적인 생각이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환상과 관념을 충족하기 위해 물체와의 관계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이용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진실한 목적이 아니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은 목적에 봉사하므로 당신이 소중히 여긴다. 그렇지만 신과 함께하면, 당신은 순수한 친밀감을 체험한다. 이 순수한 친밀감을 체험하려는 열망과 체험하는 역량의 범위가 세상에서 당신이 맺는 관계의 질과 당신의 세상 삶의 질을 전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친밀감을 체험하지 못하면, 당신은 계속 자기 관념을 충족해서 자신의 체험을 결정하려고 할 것이다.
신과 당신의 관계를 생각할 때, 당신은 답을 내놓을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묻는 것만이 필요하다. 당신은 깨달음의 문을 열기 위해 이처럼 묻는다. 삶은 답을 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수많은 답이 있는데도 당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답을 얻는 것이 주안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체험이 주안점이 되어야 한다. 관계는 체험을 통해 치유된다. 관념이 이 같은 체험으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 관념들 자체는 답이 아니다.
그러니 이 첫 장에서 지금까지 제시한 것을 주의 깊이 생각해보라. 문은 열렸지만, 궁극적인 답은 제공되지 않았다. 배우는 사람이 되려면, 당신은 답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이해를 구해야 한다.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성적으로도 이해해야 하고, 친밀함, 즉 아는 것도 체험해야 한다. 여기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성적 이해는 부차적이다. 이 아는 것은 당신을 신과 다시 연결하고, 세상에 온 당신의 큰 목적과 다시 연결한다. 이때 당신은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 신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사실, 당신은 이것을 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되었다. 그래서 당신은 목적을 지니고 세상에 왔다. 이것이 세상과 자신에게 주는 당신의 선물이며, 동시에 신에게도 주는 당신의 선물이다.
당신이 맺는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는 신을 체험하고 당신의 목적을 발견하고 당신이 공헌하는 세 영역이다. 당신이 이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세 영역이다. 이것들이 바로 세상에서 성취하는 영역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