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이전 장에서 밝혔듯이, 당신이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면 자신에게서 분리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관계를 맺으려면 적어도 당신이 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관계는 둘 이상이 조화롭게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는 환경이다. 그들은 서로 똑같이 여길 필요는 없지만, 서로 올바르게 관계 맺는 법을 배워 공동 목적을 경험하는 데 봉사하고 자양분을 줄 수 있다.
사실, 당신은 단 한 사람이므로, 자신과의 관계는 당신 마음과 몸, 이 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고려해야 한다. 당신은 마음과 몸 둘 다와 관계를 맺고 있다. 본연의 당신은 당신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니다. 당신 마음과 몸은 본연의 당신만큼 크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서 당신 삶이 의미 있으려면, 매개체인 몸과 마음을 통해 본연의 당신을 체험하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좋든 싫든, 당신은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인 세상에 있다.
마음과 몸, 이 둘과 당신의 관계는 치유와 권한 부여가 일어나야 하는 주요 영역이다. 이 관계들은 성장하는 영역이다. 신과 당신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확립되어 있으므로 성장하는 영역이 아니다. 당신이 신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당신이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넓혀감에 따라 당신의 의식은 커질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과 발전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곳 세상에서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당신이 성장과 발전이 필요 없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지금 당신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산꼭대기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산에서 당신이 있는 곳과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상황에 마음을 써야 한다.
당신은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는 주로 당신 마음과 몸, 이 둘과의 관계이다. 당신 마음은 당신 몸을 움직이는 사고 체계이다. 당신은 당신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당신 마음과 완전히 동일시한다면, 당신은 당신 존재를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 몸과 완전히 동일시한다면, 당신은 당신 마음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거의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힘의 진정한 위계질서는 당신 존재, 당신 마음, 당신 몸의 순이다. 모두 중요하다. 마음은 영과 육 사이의 매개체이다. 마음은 영을 받아들여 육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로 자기 생각과 어울리고, 그들의 관심은 자기 육체의 생존에 있다. 여기서 그들은 마음과 몸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거나 아니면 이론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존재의 체험은 종교 체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 체험은 물질 환경과 정신 환경에서 표현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물질적이지도 정신적이지도 않다. 존재의 체험은 신과 당신의 관계처럼, 설명할 수 없고 신비롭다. 심지어 이 체험을 잠깐만 하더라도 삶이 바뀔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당신 존재, 당신 마음, 당신 몸 사이의 차이를 대조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성장과 발전의 문을 열어준다.
몸은 제한된 매개체이다.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크지만, 역시 제한된 매개체이다. 만약 당신이 오직 마음과 몸의 수준에서만 당신 자신을 인식한다면, 당신은 제한적이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으로 자신을 체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과 몸은 모두 제한적이고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상태가 아닌 순수한 존재로 있는 상태에서는, 당신에게 마음도 몸도 필요하지 않다. 비록 이것이 믿기 어려워 보여도,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당신은 이것이 진실임을 알 것이다. 당신에게 몸이 없다면, 왜 마음이 있겠는가? 당신 마음이 관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당신 존재에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마음과는 매우 다르다. 이 큰 마음은 앎이라고 한다. 당신 마음은 생각하고 당신 몸은 행동하지만, 당신의 존재는 안다.
당신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당신의 몸은 가장 일시적이고 연약하다. 몸은 수명에 한계가 있다. 몸은 어려움에 시달리며,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당신 몸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보살핌과 관리가 필요하다. 몸은 세상이 당신에게 전할 수 있고 당신이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만약 당신에게 몸이 없고 오직 마음만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 전할 수 있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당신 말을 듣겠는가? 그리고 당신이 순수한 존재의 상태에 있다면, 당신은 그저 모든 것에 스며 있고 모든 것과 소통할 것이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마음보다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물질 현실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기간만큼 살 것이다. 당신의 존재는 영원히 산다. 그러므로 발전의 영역은 육체와 정신에 있다. 왜냐하면 당신 존재는 발전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을 회복할 수만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차원에서는 성장이 없고, 오직 회복과 재발견만 있을 뿐이다. 당신은 물질 환경과 정신 환경에서 당신 존재를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렇게 하기 위해 이곳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영역에서 당신 내면에 있는 분리가 치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예들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는 복잡한 철학이나 우주론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매우 단순하고 유용한 틀이 필요하며, 그 틀을 여기에서 제공한다. 그렇지만 심지어 가장 단순하고 유용한 틀조차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말로 명백한 것을 알아내려면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는 것을 꿰뚫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몸과 마음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여기서 성장이 일어난다. 실제로는 영적 성장이 없다. 당신은 당신의 영이 빛날 수 있도록, 물질적·정신적으로 발전한다.
이미 말했듯이, 몸은 마음을 섬기고, 마음은 영을 섬긴다. 이것이 올바른 질서이지만, 당신이 현재 경험하는 질서는 아니다. 현재 당신이 경험하는 질서는 마음이 몸을 섬기고, 영이 마음을 섬긴다. 당신이 주로 생존과 개인적 성취에 마음을 쓰면, 당신은 몸과 마음을 섬기는 모든 것에 마음을 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당신의 관계를 이용할 것이고, 알게 모르게 신도 이 목적에 기여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앎을 회복하는 아주 초기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몸의 생존, 몸의 편안함, 몸에 필요한 것들, 몸의 아름다움 등 몸을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쓰려고 한다. 여기서 몸은 당신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며, 당신 마음은 여전히 몸의 노예로서 몸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이때조차 몸은 몸의 목적과 설계에 따라 마음을 섬기므로, 이것은 매우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은 것은 바로 마음이고, 다른 이들에게 매력적이 되고 싶은 것도 마음이며, 인정받고 싶은 것도 마음이고, 다른 이들이나 삶을 지배하고 싶은 것도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몸은 실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몸은 마음이나 환경에 반응한다. 그런데 영에 반응할 수도 있다. 당신의 몸이 영을 섬긴다면, 앎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며, 당신의 진정한 발전이 목표로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진화에서 가장 초반부에는, 모든 것이 몸을 섬긴다. 당신은 단순히 자기 목적을 채우려고 몸을 이용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몸이 실제로 당신 마음을 섬긴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몸이 마음을 섬길 때 당신은 삶에 더 큰 결정권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 마음은 당신의 생각과 의지와 목적의식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계발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 몸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사실상 바뀔 수 없다. 몸은 상황에 반응한다. 몸은 추우면 춥고, 더우면 덥고, 배고프면 배고프고, 피곤하면 피곤하다. 만약 몸을 가장 중시하면, 당신은 자결권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몸이 마음을 섬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당신의 진화에서 큰 진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생각할 수 있으므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 마음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마음인 앎에 응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마음은 성장하는 큰 영역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영과 육 사이를 잇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당신 의식이 계속 진화하면서, 당신은 당신 마음이 자기만의 목적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목적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의 목적이 다른 이들과 분리된 것에 바탕을 두고, 또 다른 이들을 배제하려는 개인적 권한에 바탕을 둔다면, 당신은 몸이나 관계를 파괴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마음은 성장의 주된 영역이지만, 유일한 영역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영적 깨달음이 진보한 단계에서도, 몸 또한 수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은 단순한 생존의 매개체에서 소통의 도구로 바뀐다. 이때 몸은 당신 마음이 큰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이 된다.
대부분의 개인 성장이 일어나는 성장의 첫 번째 큰 단계에서, 당신은 큰 목적을 위해 의식적으로 당신 몸이 마음을 섬기도록 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당신 몸에서 떨어져 나와 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 몸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것을 몸이 표현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몸은 여전히 몸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몸을 마음처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라면 몸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매우 심각한 실망을 자초할 것이다. 몸은 그 자체의 특성과 설계로 제한된 매개체이다. 몸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큰 힘에 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식적으로 몸이 마음을 섬기게 하면 몸과 마음을 의미 있게 공존할 수 있는 관계로 통합할 수 있다.
성장의 두 번째 큰 단계는 마음이 영을, 즉 앎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단지 큰 힘을 표현할 때만 지속적인 의미와 진정한 잠재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세상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충족하려면, 몸과 마음이 영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의 영은 이 매개체들을 통해 공헌할 수 있고, 당신 삶은 일을 마치게 되고 성취될 수 있다. 이때 진정한 행복이 가능하다.
당신 마음은 물질 현실에 있는 당신 삶 너머까지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당신이 더는 물질 현실에 머무를 필요가 없을 때, 당신은 심지어 마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이 시점에서 당신에게는 큰 상실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매우 동일시하고 있어서 당신이 바로 당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몸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므로 심지어 육체가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두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몸과 마음은 일시적인 매개체이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당신을 섬기고, 당신 마음은 당신이 물질 현실에 있는 동안 당신을 섬긴다.
이 영역들을 넘어서면, 당신은 어떤 희생이나 상실 없이 이 매개체들을 넘어선다. 사실, 쓸모없어진 이 매개체들을 유지하는 것은 큰 제약이고 얽매임이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낄 것이고, 이것이 당신 내면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육체가 세상에서 의사소통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므로 육체를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마음도 세상에서 큰 것을 전하는 매개체이므로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길 때, 작은 것이 가진 모든 의미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앎의 학생들은 그들의 몸이 마음을 섬기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 앎, 즉 존재를 섬기게 하는 과정에 있다. 그들은 물질적·정신적 매개체의 한계를 실감하므로 겸허한 자세로 이것을 한다. 여기에 더하여 마음과 몸이 앎을 섬김에 따라, 큰 것이 싹트고 온전히 제대로 인식하게 됨을 이해하면서 이것을 한다. 여기에는 속박이 없고, 오직 당신 내면에 올바르고 의미 있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
당신이 삶에서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큰 힘을 대변하는 당신 능력이다. 몸에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몸이 마음을 섬기는 것이다. 마음에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마음이 존재를 섬기는 것이다. 존재에게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존재가 신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온갖 것을 통해 신이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이해는 당신이 자신과 맺은 관계의 순서가 뒤죽박죽일 경우에만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당신 마음이 몸을 섬기고 싶어 하는 동안, 당신은 여전히 신이 당신 마음을 섬기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뒤바뀌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몸을 섬기면, 틀림없이 몸만큼 연약해지고 오류에 빠지기 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신이, 몸을 섬기는 마음을 섬기기를 당신이 원한다면, 신 역시 연약하고 제약받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 신이 어리석거나 잔인하거나 연약하게 보인다. 몸은 어리석거나 잔인하거나 연약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몸이 마음의 이러한 동기들을 섬기는 경우, 어리석거나 잔인하거나 연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없으면 몸 자체만으로는 심지어 존재하지도 못하고, 의미가 없고, 단지 유기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몸에 생명을 주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에 생명을 주는 것은 존재이다.
세상의 삶은 물질 현실이므로 물질의 움직임으로 보인다. 세상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물질 뒤에 있는 마음이다. 마음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것에 스며 있는 존재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식으로 삶을 생각한다면, 몸과 마음과 존재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당신 마음은 여전히 몸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생존하거나, 호감을 사거나, 좋아 보이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좋아 보이게 하는 일은 생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생존은 계속 숨쉴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안전과 의미를 얻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삶에는 오직 두 가지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좋아 보이는 것이다. 당신 생각은 상당 부분이 고통과 죄책감과 불안을 상쇄할 수 있도록 좋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당신은 몸이 좋아 보이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같은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마음은 자신의 불안을 상쇄하려고 몸을 이용한다. 마음이 마음의 근원과 분리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불안할 수 있겠는가? 이때 마음이 큰 힘과 분리된다. 그렇지만 신과 당신의 관계가 당신에게 더 현실적이고 분명해질 때, 또 당신이 신과 당신의 관계를 더 완전하게 체험할 수 있을 때, 죄책감과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근본 원인인 당신의 분리감은 지워질 것이고, 결국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죄책감과 두려움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면 몸과 마음을 새롭게 이용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꿀 때 몸을 새롭게 이용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마음이 당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신이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마음이 실제로 당신일 수 없다는 뜻이다. 당신은 마음이 자신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여전히 여기에는 관계가 있다. 당신에게는 당신인 마음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있다.
당신이 마음과 몸, 이 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당신 마음과 몸의 한계는 물론 그것들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훌륭한 것들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몸은 경이로운 매개체이고 경이로운 메커니즘이다. 몸이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놀랍다. 몸은 단순히 좋아 보이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도록 당신이 전적으로 보살피고 발달시킬 가치가 있다. 마음이 물질적·사회적 생존의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을 때, 마음은 오직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몸을 이용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창의성의 의미이다. 창의성은 몸이 마음을 위한 소통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이 큰 힘에 봉사함으로써 소통의 매개체로서 모든 의미를 부여받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영과 육 사이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매개체란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힘을 전달하는 것이다. 힘이 당신 마음을 통과할 때, 그 힘은 당신 몸을 통해 세상으로 전달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창조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단지 전달만 한다. 마음은 몸에 지배권이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마음이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지 않는 한 몸은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몸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몸이 죽더라도, 마음은 물질 현실에서 자신의 삶에 역점을 두고 계속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또한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알게 모르게 마음은 영을 섬기기 때문이다.
당신 몸처럼, 마음도 훌륭한 도구이다. 마음은 당신 몸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과 능력이 있다. 마음은 훨씬 더 훌륭한 매개체이다. 사실, 몸과 비교하면, 마음은 거의 신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상위의 힘은 항상 하위의 힘에게 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당신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마음은 몸과 비교하면 신처럼 보일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마음을 신이라고 하거나 신처럼 생각한다. 그렇지만 마음 자체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마음은 신을 섬길 때 신이 된다. 몸은 마음을 섬기므로, 몸이 신을 섬길 때 몸 역시 신이 될 것이다.
마음은 신을 섬기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섬기려고 한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오직 신, 개인의 상상, 이 둘만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상은 실재하지 않는 생각을 섬긴다. 개인의 상상은 기반이 없는 일시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상상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잘못 쓰이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뿐이다. 당신 안에는 나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잘못 쓰이고 있을 뿐이다. 몸은 나쁘지 않으며, 중립적이다. 몸의 가치는 몸이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몸이 마음의 상상만을 섬긴다면, 몸은 혼란스럽고 파괴적이며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몸이 신을 섬기면, 그 섬김으로 신이 된다.
당신이 마음을 열고 당신의 영적 힘인 앎을 알아차리는 의식을 키우기 시작할 때, 당신은 점점 더 당신 마음을 매개체로 볼 것이고, 그럼으로써 당신 마음은 훨씬 더 폭넓게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 관계의 맥락에서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관계는 성장이 예상되고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주로 관계와 앎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앎이 목표이고 관계는 수단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관계가 목표이고, 앎은 수단이다.
당신 몸이 진정으로 마음을 섬길 때 당신은 몸을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의 몸이 당신의 상상을 섬긴다면 이때 당신은 몸이 섬기는 것에서 오는 고통과 불화와 혼란을 겪을 것이므로 몸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몸이 마음을 섬길 때 몸을 사랑할 수 있고, 마음이 신을 섬길 때 마음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은 오직 사랑 그 자체를 섬기는 것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은 오직 불변의 것을 섬기는 것만 신뢰할 수 있다. 당신이 여기 온 참된 목적을 몸이 표현할 때 당신은 몸과 함께 평화롭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통해 큰 힘을 섬기는 데 자신을 내줄 때 당신은 마음 안에서 평화롭게 있을 것이다.
자기 사랑은 사랑 그 자체를 표현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당신은 사랑 그 자체에서 따로 떨어져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은 분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연민으로 당신의 장애와 혼란을 받아들이려고 시도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친밀감을 체험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며, 당신은 삶 자체와 분리되면 자신과의 친밀감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을 회복하려면, 참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개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당신의 개체성은 영, 즉 앎을 섬기면서 새로운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갖는다. 당신은 여전히 별개의 개체로 인식되지만, 이제는 그 인식 자체로 사랑받고 부양된다. 이때 당신의 갈등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삶에 대한 당신의 체험은 깊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개체성을 잃을까 매우 걱정한다. 이것은 그들 마음이 몸을 섬기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보다 훨씬 더 또렷이 서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 몸이 마음을 섬기고, 당신이 이것을 의식하고, 앎에 맞추어 몸이 봉사하는 방향을 바꾸어 주면, 분리된 느낌이 훨씬 적어질 것이며, 당신의 개체성이 존재하니 당신이 세상에 특별한 것을 줄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때 당신의 개체성은 고통과 갈등의 원천이 아니라 기쁨의 원천이 된다.
자아란 다름 아닌 마음에게 몸을 계속 섬기게 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시도는 육체를 벌하고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이 파괴적인 방식을 되돌리는 것이 신의 첫 번째 목적이다. 왜냐하면 신의 첫 번째 목적은 당신을 세상에 오게 한 큰 목적을 당신이 표현할 수 있도록 당신의 갈등에서 생긴 짐을 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들은 분리되지 않으므로 마음 사이의 분리를 보기는 훨씬 더 어렵다. 마음을 결합하는 것은 큰 힘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큰 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자기 생각을 섬기고 몸을 이 생각의 노예로 만든다면, 큰 혼란과 갈등이 있을 것이고, 어떤 것도 분명하거나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존재를 섬기면, 마음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건설적이고 조화롭게 참여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 또 당신 참여의 본질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앎이 아닌 다른 강박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강박과 욕망은 상실과 분리의 두려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이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삶은 항상 분리하려는 당신의 시도를 약하게 하고 당신의 생존을 위협하므로 당신이 분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대단히 어렵고 몹시 두렵기 때문이다.
당신 마음이 영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점 알고, 관계에서 자신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며, 다른 이들을 분별하는 법과 그들의 동기를 분별하는 법을 배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목적과 진보를 위해 꼭 필요한 이들과 가까워질 것이고, 꼭 필요하지 않은 이들, 불화를 일으키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요건을 치유할 것이고 기쁨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역량을 키워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 주로 이 둘과 당신의 관계인 당신 자신과의 관계에 마음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이 현재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에 있든 그렇지 않든, 다른 사람들과 당신의 관계는 오직 당신 자신과 맺은 관계의 상태만을 반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당신의 관계는 당신 자신과의 관계가 참된 표현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