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월 1일
미국 뉴욕 올버니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다른 전망점에서 앎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앎은 매우 크며, 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앎에 접근하기 시작하려면, 당신은 앎의 현실과 역할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앎은 당신의 참 자아, 당신의 참 존재이며, 물질 환경과 정신 환경을 모두 넘어선 당신의 참된 삶이다. 앎은 여전히 신의 일부인 당신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앎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영역인 정신적·물질적 삶으로 자신을 확장한다. 앎은 역할이 있고, 이 점에서 영적 힘이다. 당신은 내적 안내를 통해 앎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내면에 영적 힘을 지니고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앎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앎에는 분리가 없다. “당신의” 앎과 “내” 앎이 없다. 당신의 평가와 내 평가는 있을 수 있고, 당신의 이해와 내 이해는 있을 수 있지만, 앎 자체는 모든 개개인 안에서 전적으로 한결같다. 앎은 이미 본질적으로 완전히 연결된, 사람들의 일부이다. 앎은 세상에 온 목적이 있으므로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을 넘어서면, 앎은 순수한 체험이며, 영원하고, 완전하다.
당신은 앎을 통해 영적 진보와 정신적 성장과 물질적 성취를 위한 모든 수단을 얻는다. 왜냐하면 당신의 앎에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의 개인 마음을 통해 말하는 큰 마음이다. 당신은 큰 마음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의 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자아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높은 자아가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물질 영역 너머에서 당신을 돕는 내면의 교사들의 앎과 연결되어 있다. 앎은 세상 모든 사람 내면에 잠재력으로 존재한다. 개개인이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앎은 깨어나서 훨씬 더 활발해진다. 이것이 내적 안내의 본질이다.
비록 당신이 내면의 교사들에게 메시지를 받을 수 있더라도, 당신을 안내하는 것은 바로 당신 앎이다. 당신의 교사들은 당신 마음에 말하지만, 당신 앎은 이미 당신 내면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심지어 당신의 분리된 세상 삶 안에도, 또 삶에서 당신을 가리고 당신에게 삶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만의 상상 속에도, 앎은 당신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실로 연결된 것하고만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의 관념이나 환상은 물론, 이것들을 지지하기 위해 당신이 세상에서 구축하려고 한 어떤 것과도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현실적인 것은 구축되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구축하여 유지하려는 시도는 엄청난 고통과 희생과 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고통과 희생에 익숙한 당신은 불안한 마음으로 처음에는 이 가르침에 응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제공하는 것 중 작은 부분이라도 받아들이면, 당신은 즉시 힘을 얻고 확인을 받는다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당신의 관념은 확인받지 못할 수 있고, 당신의 가정은 의심받을 수 있으며, 당신의 결합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당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공명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가슴이 공명할 때 참된 관계의 체험이 당신에게 스며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주에서 당신을 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각하기 이전에 앎이 있었고, 생각하고 난 이후에도 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당신에게 마음이 있으므로 생각은 필요하다. 생각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몸이 있다. 그러므로 몸은 건설적인 방법으로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은 건설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물질적·정신적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일부로 있는 큰 현실은 세상에서 당신을 통해 그 현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위대함과 다른 사람들의 위대함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당신은 영적 가족에 대한 체험을 세상 안으로 확장한다. 이때 당신은 세상에 있으면서 고향을 체험한다. 이 체험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모든 이를 깨어나도록 자극한다. 이것이 앎의 신비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앎이 상대방의 앎에 불을 붙일 때이다. 이것은 신비로우며,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인간의 생각에 모든 가치와 목적, 의미,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노력에 모든 목적과 의미와 방향이 부여된다. 여기에서 일시적인 성취에 영구적인 가치가 부여된다. 여기에서 우주에 있는 관계들이 회복된다.
당신이 앎을 분별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앎이 당신을 위한 내적 안내의 원천이 되면, 앎은 더욱더 강력해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실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더욱 강해질수록, 다른 이들을 자극하여 자신들 내면에 있는 앎에 마음을 열게 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가르침이다. 다른 형태의 가르침은 이 가르침을 준비하는 데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과 몸은 앎에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앎 그 자체이므로, 실제로는 앎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하지만 비록 당신이 당신 내적 삶의 위대함을 순간적으로 잠깐 들여다보았을지라도, 앎은 당신이 아직 완전히 체험하지 못한 당신의 일부이다. 당신은 당신 앎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계획하거나 꾸민 것, 또 선호하는 결과나 선호하는 관계를 앎이 해칠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앎은 단지 당신에게 화합과 행복을 가져오려고 모든 것을 조정할 뿐이다.
앎과 함께 있으면, 당신은 앎의 힘을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앎과 함께 있을 때, 앎의 영향력이 당신에게 미칠 것이고, 당신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고, 누구와 함께 있고,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을 자제하고, 무엇을 베풀고, 무엇을 제지하고, 언제 가고, 언제 멈춰야 하는지 점점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알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앎의 외적 발현이며, 이 발현이 당신에게, 또 당신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한다. 훌륭한 행동이 이 발현이고, 훌륭한 생각이 이 발현이며, 훌륭한 공헌이 이 발현이다.
왜 어떤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삶을 넘어 후대까지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는가? 왜 어떤 사람의 말이 그들 생이 끝난 후에도 후대까지 영감을 주고 용기를 주는가? 이것은 그들의 행동과 말에 앎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의 공헌이 해를 거듭하여 계속해서 삶을 윤택하게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에 앎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왜 어떤 관계들은 끝에 가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근원, 자양분과 영감이 되는 근원이 되는가? 왜냐하면 이 관계들에 앎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 마음이 더욱 단순하고 솔직해질수록, 앎은 더 강력해진다. 앎은 당신이 내면에 지닌 빛이므로 이때 빛나기 시작한다. 앎은 생각하지만, 당신 마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앎은 논쟁하지 않으며, 비교하지 않는다. 앎은 대조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앎은 추측하지 않으며, 상상하지 않는다. 앎은 조용하다. 앎은 생각하면 알고, 알면 행동한다. 앎은 평화로운 상태에 있으면서 동시에 활동하는 상태에 있다.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바로 이 상태를 체험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앎의 평화는 경계도 끝도 없다. 앎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지만 강력한 행동과 창의적인 생각에 영감을 주는 그 능력은 세상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앎을 체험하는 것은 신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체험은 당신 관계들 안에서 일어난다. 당신이 그 관계들을 제대로 맺고 있다면, 그 관계들은 앎을 체험하도록 당신을 준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 앎의 효과와 영향을 당신 관계에서 볼 것이다.
당신에게는 앎에 대한 많은 관념이 있을 것이다. 그 관념들은 대부분 쓸모없다. 그중 일부는 위험하다. 이것은 여전히 관념과 관념론이 실제 체험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앎에 장애가 되는 그런 관념들은 내려놓고, 앎의 출현을 돕는 그런 관념들은 장려하는 것이다.
당신이 앎을 회복하는 것은 필수이다. 앎은 당신의 모든 참된 성취와 행복과 관계에 담긴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당신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의 선택권은 제한적이므로, 매우 강한 힘이 있고 중요하다. 여기서 당신은 힘과 권위를 가지고 선택하는 위치에 있다.
오직 앎만이 신을 알며, 오직 앎만을 당신이 알 수 있다. 관념은 앎을 향해 나아가도록 당신을 격려하거나, 아니면 당신을 낙담하게 하여 앎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은 앎 자체가 아니다. 세상에서 앎을 담을 수 있는 관념은 없다. 하지만 앎은 진정으로 이롭고 가치 있는 모든 관념을 담고 있다. 세상에서 정말 작아 보이는 당신이 그처럼 큰 가능성과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영적 가족의 현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영적 가족에 속한 구성원들은 서로 상대방의 앎에 불을 붙일 수 있고, 그리하여 영적 의식과 영적 힘에 진실로 입문하는 맥락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이것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알 수만 있다면, 당신은 결코 앎이 회복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다. 앎은 당신을 보살피고 사랑하고 보호하며, 모든 관계에서 당신이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부적절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관계는 피하도록 당신을 이끈다. 앎은 모든 건설적인 결정을 부추기고, 모든 파괴적인 행동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말린다. 앎은 모든 관계를 존중하고, 당신이 결합해야 하는 이들에게 가도록 당신을 인도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다른 사람 내면에 있는 앎에 불을 붙인다. 그러므로 앎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다. 그들의 공헌은 즉각적이고 심오하며 지속적일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대단할 수도 있고,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는 앎이 배어 있으므로, 세상에 있는 신의 현존을 실연할 것이다.
앎의 위대함을 숙고할 때, 세상에서 큰 역할을 맡는다는 뜻으로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앎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방식, 가장 단순한 몸짓, 가장 평범한 행동, 가장 단순한 삶, 가장 초라한 일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을 함으로써 당신이 전달하는 것은 체험이다.
그래서 여기서 주안점은 앎을 열망하는 법, 앎을 체험하는 역량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의미 있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관계에 대한 열망, 관계를 체험하는 역량을 키우는 법을 배운다. 당신 역량을 키우는 것의 일부는 지금 당신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 당신이 이 체험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로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면, 새로운 체험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 마음이 자신의 판단과 불용서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면, 은총과 행복의 체험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이미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한다면, 상대방의 현실을 과연 어떻게 체험할 수 있겠는가? 앎의 회복은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잘못 배운 것을 버리는 것에 가까우며, 새로운 자산을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을 포기하는 것에 가깝다. 앎의 회복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우므로, 당신에게 의미 있거나 유용한 어떤 것도 빼앗지 않는다.
앎은 당신에게 세상에서 행사할 수 있는 큰 힘과 권한을 주지만, 당신의 겸손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항상 당신 마음이 큰 힘을 섬긴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신이 당신 몸과 마음에 대해 훨씬 더 큰 지배권을 행사하도록 요청받겠지만, 당신은 몸과 마음이 당신의 통제나 규정 너머에 있는 큰 힘에 봉사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에게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주권자가 될 힘과 권한이 부여된다.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이 그 일부로 있는 더 큰 영역을 당신 영역이 표현하는 것임을 안다.
이것은 힘의 경쟁을 종식하므로 분리를 종식한다. 신이 없다면, 당신은 신이 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의 성취를 결정하려고 할 것이고,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려고 할 것이며,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통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세상과 우주를 바꾸려고 할 것이고, 자신을 지배하려고 할 것이며, 자신이 실패했을 때 자신을 몹시 괴롭힐 것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살아있는 힘이다. 사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삶이며, 당신 내면에 있는 신의 현실이다. 당신은 앎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될 것이다. 앎이 처음에 하는 일은 당신 삶과 관계에 조화와 균형을 가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앎의 목적은 훨씬 더 크다. 당신이 고향에서 가져온 선물은 당신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선물은 주로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물을 당신에게서 끌어내려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당신 혼자서는 그 선물에 접근할 수 없다. 그 선물은 마치 당신 내면에 있지만, 다른 사람이 열쇠를 쥐고 있는 숨겨진 보물과 같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다른 사람들의 보물을 여는 열쇠를 쥐고 있다. 당신이 없으면 그들은 보물을 찾을 수 없다.
앎은 매 순간, 매일, 모든 상황, 모든 곳에서 당신과 함께 있으며, 모든 사람과 함께 있다. 당신이 앎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우면, 당신은 자신의 비난, 자신을 통제하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이때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울 것이다. 고요와 함께하면, 당신은 분별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보고 들을 수 있고, 소통의 도구로 몸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가혹한 생각을 이행하려고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당신이 참된 것과 의미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이 진실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분열된 것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앎은 당신을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고, 당신이 내리는 결정 등에서 당신을 안내한다. 그렇지만 일단 당신이 앎을 받아들이는 법과 앎과 함께 머무는 법을 배우면, 앎의 힘은 당신 내면에서 더욱더 명백해진다. 앎의 힘과 함께하면, 당신은 처음부터 관계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두려워하는 것과 조심하는 것의 차이를 배우기 시작할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의 부정적인 상상을 세상에 투영한 것이지만, 조심하는 것은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과 조심하는 것은 서로 전적으로 다른 체험이다. 당신은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조심하는 것은 당신 마음을 화나게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앎을 해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별하고 알아차리며 조심하면, 이것은 세상에 건전하게 접근하는 방식의 일환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찾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앎을 찾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앎을 찾으라. 이 모든 것은 보답으로 당신에게 앎을 제공할 것이고, 앎으로 가장하는 모든 것과 앎 사이의 차이를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품은 믿음과 앎 사이의 차이를 알 것이다. 왜냐하면 앎과 생각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생산적인 생각이 앎에서 나올 수 있지만, 생각은 힘과 권한에서 결코 앎과 견줄 수 없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 특유의 것이지만, 앎은 모든 이가 공유한다.
가장 큰 공헌에는 앎이 배어 있다. 이 공헌이 생각이든, 물질적 창조물이든, 일종의 예술이든, 과학이든, 사회 조직이나 정치 조직이든, 그것에는 앎이 배어 있을 것이다. 앎이 깃든 삶은 세상에서 영원히 빛나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자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앎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삶이다.
위대한 개인은 없지만, 위대한 관계는 있다. 앎의 입문과 앎의 발산은 오직 관계 안에서만 일어난다. 개인 혼자서도 위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개인은 위대한 관계의 맥락 안에서만 위대할 수 있다. 당신은 서로 맺은 관계의 크기 때문에 위대하다. 당신은 영적 가족과 당신의 관계 때문에도 위대하다. 당신은 궁극적으로 신과 당신의 관계 때문에 위대하다.
당신이 앎을 향해 계속 여행하면, 앎은 앎이 표현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줄 것이다. 앎은 당신이 내면에 있는 앎을 기르기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도 보여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앎과 선호하는 생각을 구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또 모든 상황에서 앎이 당신을 돕도록 허용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앎을 기른다. 당신은 나아가면서 답이 이미 당신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답을 불러내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당신이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뿐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혼자서는 왜 진리를 찾을 수 없는지, 혼자서는 왜 영적 현실을 찾을 수 없는지, 혼자서는 자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 왔는지에 대한 질문에 왜 답할 수 없는지를 알 것이다. 오직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서만 이것들을 알 수 있고, 최종적으로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
당신이 앎과의 관계를 체험할 때, 기지의 세상에서 사는 당신 삶에 궁극적으로 조화와 균형과 이해가 생길 것이다. 이때, 당신의 현재 영역을 넘어선 관계의 더 큰 영역인, 미지의 영역과 당신의 관계도 알게 될 것이다. 이 큰 영역이 저승에서 당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