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Text


1993년 10월 2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신은 세상에 매우 깊고 넓게 참여하지만, 이것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일단 신이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신에게 많은 기대를 한다. 그들은 신이 자신들의 개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재난에서 자신을 구해 주고, 사랑하는 이가 아플 때는 회복하게 해주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고난을 막아주고, 전쟁하는 부족들 사이에 평화와 평온을 가져오고, 누구의 중대사나 우선순위도 뒤엎는 일 없이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누구를 불쾌하게 하거나 변화시키거나 누구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크고 작은 기적을 가져오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가 인류 문화에 팽배하고, 세계 종교 대부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신이 무엇이고, 세상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접근과 이해를 제시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한 개념을 준다고 해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아님을 미리 말해 두겠다. 개념이 단순할수록, 그 개념을 통합하고 경험하고 적용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쉬워 보이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빠르고 쉬운 방법이 가장 어려울 수 있다. 단순한 개념이 의미를 완전히 간파하여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제 단순한 개념을 알려 주겠다.

신은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회복한다. 달리 말하면, 신은 당신을 부르고 있고, 당신에게는 깊은 수준에서 응답할 기회가 있다. 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신을 부르고 있다. 즉, 신의 한 부분인 당신의 일부, 신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과 내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당신의 일부, 세상에서 당신의 큰 목적과 사명과 운명을 담고 있는 당신의 일부, 세상에서 당신의 진정한 동행자와 진정한 동반자, 당신의 진정한 노력을 알아볼 수 있는 당신의 일부를 부르고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이런 큰 면인 앎을 접촉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신이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해 보일 것이다. 심지어 신이 모순적으로 보일 것이다. 당신은, “신은 평화를 약속하지만,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신은 위안을 약속하지만, 위안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확신을 약속하지만, 확신이 어디 있는가? 나는 그것을 내 주위에서 볼 수 없고, 내 안에서 느낄 수 없으니, 신은 틀림없이 잔인하거나 혼동하고 있거나 나약할 것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신은 관계의 맥락 안에서 당신을 회복한다. 당신은 관계의 맥락 안에서 신을 회복한다. 여기서 당신은 함께 다시 관계를 맺는다. 신과 당신의 관계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신과 당신의 관계는 단순히 부정되고 잊혔으며,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당신은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세상에 왔다. 이곳에서 당신 체험을 통해, 당신은 당신을 파견한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기회가 있고, 또 영적 가족의 구성원들, 당신과 영적 가족의 관계, 모든 관계의 근원과 당신 관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기회가 있다.

우리는 앎의 회복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체험된다. 왜냐하면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당신의 앎이 입증되거나 검증되지 못할 것이다. 온전히 체험하려면, 앎은 실제 관계의 맥락 안에서, 즉 생각이나 이론이나 원칙과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이와의 관계 안에서 영향을 미쳐야 한다.

신은 당신 안에 있는 앎을 통해 일한다. 신은 이곳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므로,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에게 기적이나 엄청난 자비, 용서와 같은 큰 것들을 기대하지만, 어떤 간섭도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이 절박해지기 전까지는 구세주를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이 진정으로 감옥에 갇혔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 만약 신이 당신의 모든 기도에 응답한다면, 당신은 신이 당신 삶을 떠맡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당신 삶을 떠맡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상상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실재 삶을 살 수도 있다. 신은 당신을 실재 삶, 당신이 알 수 있는 삶, 당신이 받아들여 헌신할 수 있는 삶으로 당신을 데려간다. 이런 삶이 없다면, 진정한 헌신도, 진정한 이해도, 진정한 안전도 없다.

신은 개입하지 않는다.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당신은 신을 완전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시기, 삶의 이 맥락에서는 당신의 역량을 훨씬 초월한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계획과 목표가 간섭받는 것을 얼마나 원하지 않는지 안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간섭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이 부모의 개입을 원하는 것은 오로지 곤경에 빠지거나 위험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뿐이다. 그들은 부모가 자신을 곤경이나 위험에서 구해 주거나, 자신의 비용을 지불해 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관계를 입증하거나 인지하는 것이 아니며, 의존과 반항의 한 형태이다. 세상에는 이러한 의존과 반항이 매우 많다. 이것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종교를 이용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신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온갖 잔인함과 공격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종교가 비난이나 의심을 받고, 욕을 먹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야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이 종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걸인이나 도둑으로 신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을 걸인이나 도둑 어느 것으로도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삶에서 자신의 권한과 위치를 인지하고, 당신에게 딱 맞고 당신이 그 일부인 더 큰 맥락을 인지하면서, 창조물의 일부로서 다가가야 한다. 당신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이런 인식을 회복하도록 당신을 도우려면,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당신은 방관자의 태도로, 신이 당신의 뜻과 요구에 따라 중재하고, 당신 하인이 되어 당신을 위해 물건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거나 간청하거나 꼬드기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당신도 알 수 있을 만큼 너무도 터무니없고 무지하고 주제넘은 행동이다. 당신은 이런 접근과 행동에서 진정한 가치나 장점이 전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은 앎을 통해 세상에서 일한다. 신은 큰 공동체 신이므로, 어떤 다른 곳을 떠나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세계 종교에서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종종 신이 다른 모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지구에 몰두하고 있다고 여긴다. 신과 지구와 인간이 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인간과 신 사이의 이 거대한 연극에 배경의 일부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은 우리가 말한 큰 공동체 신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생명의 신이다. 신은 당신이 사는 행성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오지 않는다. 신은 다른 곳에서의 책임은 저버리고 인류의 문제와 요구, 인류의 기대에만 유별나게 몰두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신은 모든 곳에서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회복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당신을 당신 자신과 삶으로 복원하는 것이 앎이므로, 회복은 앎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 개인 마음은 신을 알 수 없다. 당신 개인 마음은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따를 수만 있고, 당신 내면의 앎은 우주 앎을 따른다. 그때 모든 것에 올바른 질서가 잡힌다. 그리고 올바른 질서에서 진정한 관계가 나오고, 진정한 관계에서 한결같은 의사소통이 일어난다. 이때 당신이 세상에 공헌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은 단지 일이 되게 하려고 개인적으로 뛰어다니고,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위한 전달자가 된다. 이 큰 것은 신비하고, 정의될 수 없으며, 심지어 지구의 신학 체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으며,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쓰이거나 이용될 수 없다. 또한, 모든 곳에 있고, 자연스러우며, 널리 스며 있고, 인간의 간섭으로 변질할 수 없다. 인간의 간섭이 잘못 이끌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각을 통해 인지하는 이들뿐이며, 신이 하는 일의 본질은 인간은 물론 큰 공동체에 있는 어떤 종족도 오염시킬 수 없다. 이것을 이해하면, 당신은 신과 당신의 관계에, 또 세상에서 신의 현존과 활동에,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에 대한 예는 무엇인가? 신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특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당신을 당신 자신에게 복귀시키고자 하며, 삶과 당신의 진정한 관계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그대로의 본래 관계로 당신을 되돌리고자 한다. 신은 당신 내면의 앎을 증폭하고, 당신을 불러, 앎으로 돌아가게 하고, 앎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앎에 대한 존경심을 키운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자존감이 회복되며, 더 큰 권한에 접근하기 위해 당신이 행사해야 하는 당신의 권한 또한 확인된다. 당신은 쉽게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여 큰 힘에 내맡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코 효과적일 수 없다.

당신이 신을 대변하려면,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걸인으로 다가가서도 안 되고, 수동적이 되어서도 안 되며, 단순히 자신을 내맡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는 것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실제로 준비하기에 너무 게으르거나, 아니면 너무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신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기를 원한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의 대부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험해야 하는 것은 신의 일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능력과 성취이다.

당신이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의 인식과 경험을 부정하는 것, 모든 것을 신에게 내맡기는 것 등, 당신의 모든 권한을 포기하는 것이 멋진 자유와 탈출로 보이지만, 당신의 진정한 능력과 가치를 회복하는 방법이 아니다. 신은 찬양이 필요 없다. 이 세상에서 입증이 필요한 이는 바로 당신이다. 신은 자존심을 내세우도록 사람들을 자극하는 자아 욕구에 이끌리지 않는다. 신이 당신처럼 생각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신은 끔찍하고, 모순되어 보이거나, 잔인하거나 무기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신에 대해 실망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신도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삶과 그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는 투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당신 개인 마음과는 다른 마음이고 지성인 앎의 수준에서, 신은 움직인다. 앎은 묵인하지 않으며, 배반하지 않는다. 앎은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다. 또한, 개인의 이득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고, 경쟁적이지 않으며, 논쟁하지 않는다. 앎은 궁금해하지 않고, 혼란스러워하지 않으며,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 앎은 알고 있으므로, 행동한다. 그리고 행동하지 않을 때는 침묵하고 현존한다. 앎은 절대적인 확신이 있으므로 무한히 인내한다.

앎은 당신 개인의 마음과 몸을 보호하지만, 당신이 자신을 해치는 것은 막지 않을 것이다. 앎은 신처럼, 간섭이 환영받지 않는다면,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앎은 당신이 현명한 결정을 하고, 관계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극과 신호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설혹 이러한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따르지도 않고, 또 응답할 수도 없다 하더라도, 앎이 와서 당신을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앎은 당신을 비판하지도, 지옥으로 추방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신을 비난하지도, 심판하지도 않을 것이다. 앎은 당신이 실패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어쩌면 그때 당신은 필요성을 더 깊이 느끼며, 더 큰 진실한 마음으로 앎에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앎은 완벽하게 정직하다. 앎은 갈등이나 속임수가 없다. 당신 개인 마음에는 갈등과 속임수가 있다. 순수하게 정직한 것이 부정직한 것을 다룰 때는 대단한 요령과 주의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싶다면, 앎길을 따르고, 앎과의 관계를 찾고, 앎이 당신 삶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많은 경험을 통해 시간을 두고 배우라. 그러면 추측에서 나온 것이 아닌 실제 다양한 경험에서, 당신은 세상에 있는 신의 현존이 가진, 놀라운 은총과 힘과 충만함을 보고 이해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신은 내면에서 밖으로 일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상에 대리인이 있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특사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당신이 볼 수 있는 이들도 있고 볼 수 없는 이들도 있다. 불가시 존재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큰 가능성을 보이는 특정 개인들, 그리고 앎길에서 충분히 진보한 특정 개인들과 함께 일한다. 불가시 존재들은 그들 존재가 대체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도움을 준다. 이것이 세상에서 일하는 신이다.

신은 무대 뒤에서 일한다. 신은 기회를 주며, 복원하는 일을 준다. 신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주고, 세상에 필요한 것들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신은 마치 당신이 의지할 곳 없는 어린아이인 것처럼, 당신에게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창의력 영역 안에서, 당신의 영역 안에서, 해결할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쳐준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창안한 것이지 신이 창안한 것이 아니다. 인간 문화, 인간 윤리, 인간 신념, 인간 경제, 인간 정치, 인간 관계는 모두 인간의 창조물이며, 신의 창조물이 아니다. 당신의 창조물에 신성을 불어넣으려면 당신 스스로 신성을 끌어들여야 한다. 신은 당신 딜레마 속에 있지 않으며, 그 밖에 있다. 신은 딜레마에서 벗어나라고 당신을 부르며, 당신에게 빠져나오는 길을 제공한다. 당신의 진정한 능력을 회복하고, 당신 자신과의 진정한 관계, 또 다른 이들이나 세상과 당신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제공한다.

신의 길은 지혜롭고 효과적이다. 하지만 당신이 지혜롭고 효과적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의 길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지혜롭고 효과적일 때는 바르게 인식할 것이며, 지혜롭지 않고 효과적이지 않은 때는 신의 길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여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신은 그들을 위한 교훈으로 모든 것을 활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이 마치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은 신이 내린 축복이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은 신이 주는 벌로 여긴다. 잔인하거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실망하며, 잔인함과 무정함에 대해 신을 남몰래 원망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래, 올 것이 왔어.” 또는 “그들은 그 일을 당해야 마땅해.”, “그 사람은 그래도 싸.”, “그렇게 돼야 했어.”,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신은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일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저절로 작동하는 일련의 힘이 있다. 신은 당신에게 이 힘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고 여기 있다. 신은 당신에게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결정하면서,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지 않는다. 세상은 움직이고 있고, 정신적·육체적 환경 안에 있는 모든 무수한 힘들이 작동되고 있다. 신은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은 채로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참여한다.

직접적인 개입은 거의 없다. 이런 개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개입이 환영받고, 필요하기 때문이며, 개입을 받는 사람이나 사람들에게 관계가 더욱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신은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놓아둔다. 당신 주변이나 세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비극은 신이 한 일이 아니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있으며,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은 주의해야 한다. 신은 당신에게 주의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고, 눈을 뜨고 보는 법을 가르칠 것이며, 마음과 몸을 보호하는 법, 기량을 기르는 법, 그 기량을 효과적이고 건설적으로 쓰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신이 하는 일이다. 이 관계가 없다면, 당신은 혼자 있을 것이고, 이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용할 수 있는 더 큰 도움과 보장이 있다. 이 도움과 보장은 거짓이 아닌 진짜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도움과 보장을 환영하고 여기에 마음을 열고, 진실하다면, 또 당신의 개인적 목표나 이득을 위해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당신을 통해서, 또 당신을 위하여 일할 것이다.

신은 앎을 통해 세상 모든 곳에서 일한다. 신은 당신을 안다. 당신은 신을 오직 알 수만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신을 알기 전, 예비 단계일 수 있지만,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같지 않다. 많은 사람이 신을 믿거나, 아니면 믿지 않는 것이 두려워, 신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을 안다는 것은 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때 기존에 배운 많은 것이 버려지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것이 채워진다. 이때 많은 기존 관념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깨달음이 드러난다. 이때 오래된 문제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된다. 이때 작은 것이 작게 여겨지고, 큰 것이 크게 여겨진다. 여기서 당신은 어떤 것에는 ‘예’라고 말하고, 어떤 것에는 ‘아니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 내면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더 큰 확신에 응답하기 위해, 죄책감이나 강박충동, 인정받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욕구 등을 내려놓는다.

신은 간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사는 맥락 안에서 자신의 가치와 관계를 체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진정한 친밀감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을 알아볼 때마다, 당신은 신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느낀 어떤 것을 할 때마다, 또 정당화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유로 어떤 것을 할 때마다, 당신은 신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내면의 경고에 귀 기울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아는 것을 따를 때마다, 당신은 신을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이것은 단지 믿음이나 관습, 편의가 아니라, 본질이다.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때, 당신은 신을 느낄 것이다. 진실을 말해야 할 곳에서 진실을 말할 때, 당신은 신을 느낄 것이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일어난 일까지 포함하여 당신을 위해 행해진 것에 감사함을 느낄 때, 당신은 신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을 인지하고 체험하는 방식이다. 이 체험에서 얻는 보상은 그 체험 자체뿐만이 아니라, 관계가 구축되는 것, 행동을 취하는 것, 어려움을 예방하는 것, 공헌을 이루는 것들도 있다.

신은 당신이 세상에서 선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여기서 일하기를 원한다. 신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 신에게 매료되기를 요청하지 않는다. 신은, “당신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려고 여기 왔다. 나도 그것을 알고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당신이 아는 것을 하라.”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고향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당신은 세상에 일이 있다. 당신은 앎에 대해 배우고 있고, 앎길에 대해 배우고 있으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앞으로 나아가라. 그러면 당신은 신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을 볼 것이고, 이곳 삶의 메커니즘에 대해 신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신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인간의 실수에 대해 신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이며, 종교와 신앙과 종교권위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대해 신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에서 일하고 있고, 다른 이들과 당신을 의미 있게 결합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체험으로만 알아볼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을 종교인으로 여길 수도 있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는 여전히 당신에게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체험할 때, 당신은 몸과 마음의 참된 관계, 마음과 영의 참된 관계를 확인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참된 친밀감을 경험하고, 더 큰 목적을 함께 경험할 때, 당신은 세상에 온 목적을 입증하고 확인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신은 고향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고, 이렇게 하여 내면의 앎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하여 당신과 함께 있는 신의 현존, 불가시 존재인 교사들의 현존, 삶에서 당신의 진정한 동반자인 이들의 현존을 느낀다. 이 동반자들은 당신이 자신의 사명과 목적이 무엇이고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천천히 깨닫기 시작할 때, 당신이 그 사명과 목적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믿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알 것을 요청한다. 믿음에는 헌신이 없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믿으며,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믿음에서는 어떤 헌신도, 어떤 관계도 나오지 않는다. 믿음은 항상 나약하고 흔들리며, 삶의 어려움에 쉽게 공격당한다. 믿음의 유일한 가치는, 앎이 살아 있고 건전하다는 확신, 그 앎을 신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당신에게 되살리는 것이다. 믿음의 가치는 당신이 앎이나 진짜 관계를 체험하는 순간들 사이에 있는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앎은 같지 않다. 앎은 완전히 헌신하므로, 진정한 헌신은 오직 앎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앎은 신에게 헌신한다. 앎은 당신 삶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헌신하며,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한다. 앎은 이미 헌신적이다. 앎과의 관계로 되돌아가면, 앎이 당신에게 헌신하듯, 당신도 앎에 헌신하는 법을 알 것이다.

헌신이 구축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은 관계는 관계 자체가 아직 구축되지 않은 관계이다.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헌신이 얼마나 희귀한지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에게 매달리고, 서로를 통제하고, 놓아주지 않지만, 이것은 헌신이 아니다. 헌신은 당신 내면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다. 헌신은 당신 정신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발로이고, 앎의 표현이며, 당신의 자리와 역할을 다른 이와 함께 인지하는 것이다. 헌신은 당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보다 큰 목적을 중시하고, 당신의 안녕과 상대방의 안녕을 중시하며,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서로를 이용하려는 인간 관계에서 이것이 얼마나 희귀한지 생각해보고, 그 결과로 오는 모든 불행과 어려움을 떠올려보라.

앎에 기반을 둔 관계는 매우 다르다. 당신에게 이 관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관계들은 독특할 것이며, 당신이 경험한 관계, 즉 편리를 위한 관계, 이득을 위한 관계, 즐거움을 위한 관계, 획득을 위한 관계와 같은 온갖 다른 관계와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는 어떤 헌신도, 알아봄도, 진정한 친밀감도 없다. 앎에 기반을 둔 관계는 참으로 다르며, 이 관계가 만들어 내는 결과도 참으로 다르다. 당신이 진정한 헌신을 체험하거나, 다른 누군가가 그 헌신을 진실로 체험하고 있는 것을 인식할 때, 당신은 세상에서 신의 증거를 볼 것이다. 헌신은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며, 사랑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헌신은,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든, 어떤 세상 일을 해내는 것이든,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든,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보다 더 큰 목적을 수행하고, 더 훌륭한 어떤 것에 봉사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주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 헌신이 어떤 수준에서 표현되든 간에, 이것은 삶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경이로운 것이다. 이것은 신이 하는 일의 증거이다.

많은 사람이 신이 그들을 위해 나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할지라도, 당신은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신의 진짜 일, 즉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나 그들 상호 간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신의 진짜 일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인류에게 전해진 모든 위대한 것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 관계가 헌신을 체험하고 표현한 결과이다. 위대한 창조자, 위대한 발명가,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영적 지도자 등 위대한 이들은 모두 그들 뒤에 가시 영역과 불가시 영역 양쪽 모두에 엄청난 관계가 있었다. 그들의 구상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저세상에서 나와 인식되고 이용될 수 있는 형태로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전달되었다.

큰 마음과 연결된 마음 말고 무엇이 천재인가? 똑똑하거나 재치 있는 것, 영리하거나 민첩한 것은 지성의 표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친구는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만, 그는 매우 영특한 사람이고,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그 사람은 매우 어리석거나 위험한 어떤 것을 하고 있다. 이것이 지성의 표현인가? 아니다. 지성은 앎에서 나온다. 지성은 보고, 알고, 행동하는 능력이다. 지성은 세상에서 활동이나 행동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성은 앎과 지혜가 함께 일하는 것이다. 지성은 진실이 그 진실을 표현하는 메커니즘과 함께 조화롭게 일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성의 표현이다. 당신에게는 이 지성이 있다. 지성은 당신 내면의 앎에서 나오며, 당신은 그 지성을 체험할 수 있다. 지성은 인류의 큰 힘과 큰 가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가 이런 것을 당신에게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신은 인류의 진보가,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훌륭한 동행자를 지닌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상에서 신이 하는 일의 증거이다. 인간관계와 인류에 만연해 있고 해를 끼치는, 모든 재앙과 비극, 모든 중독과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의 일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만약 신이 세상에 없다면, 인류는 그냥 자멸할 것이다. 더 큰 것에 대한 동기도 없을 것이고, 진실에 대한 열망도 없을 것이다. 또한, 진정한 친절도 없을 것이며, 진정한 헌신이나 알아봄도 없을 것이다. 인류는 자멸할 것이다.

신은 공기와 같다. 모두가 공기를 들이마시지만, 공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든 사람은 매 순간 숨을 쉬며 살아간다. 그들의 몸은 다음 순간을 살기 위해 각각의 호흡에 의존한다. 이 공기의 공급을 차단하면 순식간에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신이 이와 같다. 깊이 스며 있고, 매우 현존하며, 받쳐주고, 북돋아 준다. 그런데도 신은 인지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고, 체험되지 않는다. 물론 신은 당신이 들이마시는 공기보다 더 크다. 하지만 이 예시는 우리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이해 범위를 넘어선다. 이것을 자각하려면, 당신은 최선을 다해 마음을 열고 높은 곳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진짜 체험으로 이끈다.

앎의 학생이 되라. 앎길을 배우라.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라. 앎이 당신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게 하라. 앎이 당신의 삶을 바로잡게 하라. 앎이 당신을 안내하고 인도하고 보호하게 하라. 앎이 당신 내면에 있는 큰 지성을 기르게 하라. 당신의 관계와 당신의 평가에서 앎이 당신을 이끌게 하라. 앎처럼 고요해지고, 앎처럼 꿰뚫어 보고, 앎처럼 통찰하고, 앎처럼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라. 당신의 진짜 동행자들을 만나라. 당신의 목적을 찾으라. 마음 놓고 기꺼이, 즐거이 다른 것들을 옆으로 제쳐 놓는 것으로, 세상에서 당신의 진짜 일이 드러나도록 허용하라.

이곳에서 당신이 진보할수록, 세상에서 신의 현존은 당신이 믿으려고 애쓰는 것이 되기보다는, 느끼고 아는 것이 될 것이다. 당신과 다른 사람들이 직면할 수도 있는 모든 비극과 어려움, 물질계 삶의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신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신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고,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신이 세상에 있으므로 당신은 이것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