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었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큰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요즈음 점점 많아지고 있다. 게다가 이 가운데 일부는 앎이 주는 메시지에 응답하기 시작했고, 앎은 이들에게 어떤 특정한 일과 행동을 하도록 알려주며, 어떤 특정한 조정이나 변화를 삶에 주도록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중 대다수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메시지가 주는 경고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신호를 보기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짐작도 하지만, 응답하지 않고 전혀 여기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앎이 그들을 움직이게 할 만큼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앎은 충분히 강하지만, 그들이 긴박감을 느끼고 움직일 만큼 앎과 충분히 강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멀리서 부르는 소리나 스쳐지나가는 모습, 덧없는 감정과 같이, 앎이 그들에게 말하지만 마치 거대하고 두꺼운 장막을 통해 멀리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앎은 그들 안에서 강하지만, 그들은 앎에 아직 응답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응답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무책임(response-ability,책임이 응답하는 능력을 뜻하는 데서)이 근본적으로 문제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할 때, 생각하는 마음에서 앎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도록 배운다. 생각하는 마음은 두뇌작용을 통해 나온 것으로 사회에서 정한 틀이나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형성되지만, 앎은 신이 내면 깊은 곳에 창조해놓은 것으로 사회가 만든 틀과 무관하며 세상의 힘으로는 절대로 바꾸거나 조종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내면에서 신호를 느끼고 세상의 신호를 보지만, 응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다리를 놓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야, 이거 문제가 심각한데.”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에게, “오늘 좀 깊이 생각해보았는데 요즈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응답하지만, 행동하는 수준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신호를 보면, 의심도 들고 걱정도 되며 경각심도 생기지만, 여전히 응답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신호는 알아채고 있으면서도, 항상 하던 일을 계속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생활을 해나간다. 물론 걱정은 더 많아지고, 큰 변화와 어려움이 가까워진다는 것도 느끼며, 어떤 특정 단면만을 보면 이미 어려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생활을 바꿀 만큼 응답하지 않는다.
신호는 당신이 단지 교양을 쌓고 대화소재를 삼아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며, 겁을 내고 걱정하라고 주어진 것도 아니다. 신호는 당신에게 지침을 주며, 대부분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라고 주어진다. 하지만 신호가 주는 메시지를 먼저 느껴야 한다. 신호가 멀리서 조그마하게 보일 리가 없으며, 덧없는 감정이나 한순간의 생각일 수가 없다. 신호가 일러준 것을 받아들이려면, 당신은 신호에 더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은 당신에게 무엇이 다가오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먼저 세상이 보내준 신호와 메시지를 알아채고 어떻게 읽어내는지 알아야 하며, 이때 당신은 자신의 생각이나 환상, 두려움 없이 읽어야 한다. 단순히 보고 듣기만 하면, 그림은 하나하나 꿰어 맞춰진다. 이렇게 마음이 명료해지려면, 결론을 내리는 일 없이 보아야 하며, 본 것을 쉽게 이해하겠다는 생각 없이 보아야 한다. 퍼즐을 맞추듯이 조각조각이 드러나 꿰어 맞추어지게 놓아두어야 한다.
이렇게 보는 것을 ‘본다’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참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 이해하기를 바라고, 당장 결론이 나와야 하며, 당장 해답을 원한다. 지금 당장 그림이 분명해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신호가 말해주는 것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림이 분명해질 때까지 간섭하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해야 한다. 이것을 ‘본다’라고 말한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어떤 것들을 듣는다. 이때 결론을 내리려 하거나, 현재 품고 있는 가정이나 믿음을 굳히려 하지 않고, 그냥 마음에 담아두어 쌓이도록 놓아둔다. 당신 개인의 관념이나 입장을 강화하려 하지 말고, 이렇게 쌓인 것이 당신에게 가르쳐 주도록 놓아두라.
물론 이때 당신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또한 가정이나 편견, 선입견 등을 밀쳐버릴 만큼 기꺼이 여기에 몰입해야 한다. 제대로 보고 들으려면, 이렇게 접근해야 하며, 보고 듣는 데 자신을 바쳐야 한다. 취미로 가끔 해보는 그런 것이 아니며, 어쩌다 한 번 보거나 듣고 마는 그런 것도 아니다. 동물들은 이렇게 한다. 동물들은 항상 보고 듣는다. 왜냐하면 위험이 있으므로 이렇게 대응하도록 갖추어져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류 모두에게 위험이 커져가고 있으며, 자연은 당신이 여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채비하여 놓았다. 그러니 생존하려면 당신은 커져가는 위험에 대응해야 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수평선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보지 않고 세상이 알려주는 신호를 듣지 않으면서, 일상 하던 일로 늘 바쁘다. 혹여 어떤 것을 듣게 되면, 가볍게 웃어넘기거나, 친구들과 토론하거나, 다른 사람과 반대되는 태도나 판단을 더 굳히는데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되고, 해야 할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는데 그 지침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만약 보고 듣기는 했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본 것도 들은 것도 아니다. 생각하는 머리를 지나 마음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응답하는(responding) 것이 아니며, 그래서 진짜 책임지는(responsible) 것도 아니다.
변화의 큰물결을 대비하려면, 많은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중 지금 당장에는 이치에 전혀 맞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고, 남들에게 설명하거나 합당한 근거를 댈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에 앎이라는 깊은 지성이 당신에게 그리하라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앎과 강하게 연결되어, 앎이 더 이상 작은 음성이 아니고, 스쳐지나가는 모습이나 한 순간의 자각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래서 앎이 당신 내면에서 깊은 확신으로 자리 잡고, 변치 않는 관심사가 되며, 꼭 필요한 것이 된다. 당신은 더 이상 앎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며 쉽게 밀쳐 내버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많은 관심을 앎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당신은 조용히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판단하지 않고 결론짓지 않으면서 신호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나 신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이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신호는 당신이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하며, 다른 것으로부터 쉽게 눈에 뜨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보통 쉽게 듣거나 읽어볼 수 있는 것으로 당신을 매혹시키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도 안쪽 깊숙이 인상을 남길 것이다. 항상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신호를 접하게 되면, 퍼즐 조각을 맞추어 나갈 수 있도록 시간·날짜·장소와 함께 기록을 남겨두라.
당신은 많이 보고 적게 생각해야 하며, 많이 듣고 적게 말해야 한다. 판단이나 비난 없이 남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들으려면, 판단하고 평가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중에서 나는 새나 산에서 사는 짐승들은 항상 귀 기울이고 지켜보고 있다. 동물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류는 오랫동안 제멋대로 행동하고 서로 싸우면서 강박관념과 중독에 빠져있었지만, 이제는 듣고 보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헛된 것을 튼튼히 하려고 하거나, 모든 것에 두려움의 그림자를 씌우려 하지 않고 그렇게 해야 한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가 가장 지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신이 강력하게 경고한다. 경고는 자비에서 나왔지만, 분명하고 강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않고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의 신호나 내면에 있는 앎의 신호를 어떻게 알아채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을 느낄 만큼 앎 가까이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러나 앎이 어떤 것을 하라고 알려주며,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하거나 하던 행동을 바꾸도록 알려준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대비하려면, 외부로부터 자신을 튼튼히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집에 음식을 충분히 쌓아두거나, 더더욱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막 전쟁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멀리 떨어진 시골로 옮겨가 무장을 하고, 모든 것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외적 준비보다 내적 준비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직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며,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당신이 여기 온 까닭은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지 도망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려 한다면, 진실로 왜 사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더구나 혼자 도모한 안전은 변화의 큰물결 앞에서는 여전히 불안전할 것이다.
당신은 달아나 바위 밑으로 숨을 수 없다. 당신은 남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당신의 재능과 기술도 공유해야 하지만, 남들의 재능과 기술도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가 의미 있게 맺어져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것이다. 멀리 달아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위험하다.
그래서 내적 준비가 그처럼 중요하다. 당신이 세상 신호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면, 당신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에 차서 행동하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하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을 것이다. 혹은 더 큰 위험 속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거나, 본질적으로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정치적 설득에 자신을 내맡길 것이다. 당신이 볼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며,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거의 대부분 당신을 더 큰 위험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신은 이미 당신에게 답을 주었다. 그러나 답을 알려면, 당신은 답에 다가가야 하고, 답과 함께 지내야 한다. 그래서 답을 바꾸거나 거부하거나 다른 것들과 결합시키는 일 없이 적용해야 한다. 당신은 겸손하고 인내하면서 동시에 헌신과 끈기로 답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당신이 용기를 내고, 밖에서 하는 일마다 용기 있게 하면,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그 용기를 얻으러 올 것이다. 그런데 단지 음식물과 다른 생필품을 비축하기만 하면, 그때는 당신이 비축해놓은 것을 얻으러 올 것이다. 도망가서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드디어 이것을 깨달으면, 당신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고, 어쩌면 이때서야 당신은 앎에 눈을 돌릴지 모른다. 당신은 또 신에게 안내해주고, 도와주고,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어쩌면 이때 마음의 문을 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앎이 주는 진짜 내적 확신이 없다면, 아무런 이점도 없고, 안전도 없으며, 분명한 것도 없고, 확실한 방향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앎의 움직임을 보고·알고·느끼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하여 앎의 지침과 세상의 신호를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행동으로 옮기고 삶의 목표를 재검토해볼 것이다. 이때가 진짜 전환점이다.
요즈음 무슨 일이 앞으로 일어날까 걱정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많은 사람이 정말 우려하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앎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변화의 큰물결을 대비하지 않으며, 그냥 걱정만 한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겨야 실제로 행동에 옮기고, 생활을 바꾸며, 인생 목표를 바꿀 것인가?
이들이 앎의 지침을 받아들여 응답할 수 있다면, 변화의 큰물결을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갖고 준비하여, 때때로 하기 힘든 변화를 해낼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여 새롭게 자리를 잡아야 강한 위치에 서고, 해로운 길에서 빠져나오며, 취약점을 줄일 수 있다. 그리하여 남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이때는 너무 늦다. 모두가 공포에 휩싸여 마치 짐승 떼처럼 허둥대며, 무작정 방향도 모르고 달아날 것이다. 아무 확신이나 이유 없이 행동할 것이며, 그 행동은 처절할 것이다.
증거가 극명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현명하게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다. 당신은 처지가 딱하게 될 것이고, 극단적으로 무기력해질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상점에서는 식량을 구할 수 없고, 은행은 영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며, 이렇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 놓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남들이 행동하기 전에 행동해야 하고, 남들이 대비하기 전에 대비해야 한다. 당신은 내면에 있는 앎의 힘에 의지하고, 세상에서 보여주는 증거를 보고 움직여야 한다. 남의 말이나 여론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변화의 큰물결이 덮칠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때는 대비하기에 너무 늦기 때문이다. 당신은 강해야 하며, 주위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앎에 응답할 수 없는 것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단순히 응답 능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직 앎에 강하게 연결되지 않았고 앎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삶에서 앎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앎에서 오는 메시지를 받아 그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의무에 있다. 그 의무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며, 각각 서로 조금씩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가족 중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문제는 훨씬 심각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처리해나가야 할 것인가? 여기에 지침이 될 만한 것이 있는가? 상황마다 나름대로 독특하기 때문에 지침은 폭넓고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그래도 몇 가지는 미리 알아야 한다.
삶에서 당신의 첫 번째 책임은 앎에 응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신에게 지는 당신 책임이며, 양심을 따르는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념이나 믿음보다 양심을 따르고, 남들과 타협하기보다 양심을 따르며, 쾌락이나 부를 추구하기보다 양심을 따르고, 가난과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 양심을 따른다. 이것이 당신의 첫 번째 책임이다.
이제 이것이 현실에서 잘 돌아가게 하려면, 오랫동안 많은 상황에 적용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닷가에 서서 큰물결을 맞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의존관계라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상황이 매우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첫 번째 지침은 먼저 앎에 책임지는 것이며, 그밖에 다른 사항들이 있다. 아이들을 성인으로 길러낼 책임이 있다. 아이들은 버릴 수 없으며 함께 머물러야 한다. 아이가 매우 파괴적이고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경우라면, 그 아이는 떼어놓아야 하겠지만, 이때도 아이가 성장 후반기여야 하며, 정말 예외적인 경우이어야 한다.
혼자 생활해나갈 수 없는 부모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것도 당신 책임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노인들을 돌보는 일은 정부나 복지제도에서 할 일이며, 당신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앞으로는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직면할 것이며, 이 문제가 이 준비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할 경우가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세상에 있으니,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보통 여기에는 심하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며, 당신은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을 느낄 것이다. 어렵고 때로는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겠지만, 당신은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경우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만약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중에 변화의 큰물결을 대비하려 하지 않거나, 대비하는 당신을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런 사람들하고는 헤어져야 하며, 그것도 빨리 헤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당신의 앞길을 막고, 당신을 방해하며, 당신은 물론 앎과 당신 관계를 비웃는다. 그들하고는 연결고리를 잘라 떠나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적개심을 품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이렇게 한다.
배우자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문제만 일으킨다면, 그 사람과 함께하느냐 헤어지느냐는 앎에 달려있다. 만약 자신이나, 자녀, 노부모를 보호하거나 당신이 다른 책임질 일을 해내는데, 헤어질 필요가 있다면, 당신은 어쨌든 그 대비를 해야 한다. 함께 앞으로 나아가질 않거나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가장 먼저 넘어야 할 큰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엄청난 방해물이고, 이미 자신의 삶을 가로막고 있으며,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그랬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앎의 학생이 되려고 할 때, “내 삶이 이 사람에게 묶여 있는데, 우리는 뜻이 맞지 않아 함께할 수 없구나. 그래서 건전하지 못한 의존성만 서로 키워 놓았구나.”라고 탄식하며 즉시 이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상황에서 자유로우려면 관계를 끊어야 한다. 앎이 예외를 둘 때만 여기에 예외를 두어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뒤에 남는다면, 당신은 산을 오를 수 없다. 그들을 능력 있게 만들고 살아갈 수 있게 하려 하거나, 설득하고 가르치고 변화시키려 한다면, 당신은 산을 오를 수 없다. 관계를 깨끗이 단절해야 한다. 삶이 이것을 요구하고, 앎이 이것을 요구한다. 당신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안다. 비록 이 일이 어렵더라도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큰 힘을 얻고, 본디 모습을 되찾으며, 자신감이 되살아날 것이다.
실패할 운명이거나 실패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실패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당신은 그들을 떠받칠 수 없으니, 그들의 인생길을 따르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그들은 당신 책임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과 노부모만 여기에 예외가 된다. 그러나 때로는 여기서조차 극심한 경우에 예외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제일 중요한 책임을 앎에 둔다면, 당신은 자유롭다. 그러나 자유는 노력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며,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마음속에 있는 다른 성향들을 극복해야 한다. 죄책감과 의무, 남의 비난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재정적으로 보장받고 싶은 욕구, 남이 인정해주고 세상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마치 적과 싸워서 쟁취하듯이, 당신 내면에서 극복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당신은 지금 서있는 곳에 머물면서 앞으로 갈 수 없으며, 남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내면에 있는 앎을 따를 수 없다.
당신은 신을 찬양하고 숭배할지도 모른다. 또 무릎 꿇고 기도하고, 사원에 가서 엎드려 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이 당신에게 하라고 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당신은 신을 존중하지 않으며,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신이 준 소명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 소명은 대체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삶이나 성취, 행복하고는 매우 다르다.
당신은 자신의 큰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그 목적이 무엇일까 추측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거창한 결론을 품고 있기 보다는 마음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낫다.
큰물결을 대비하는데 진짜 문제는 당신이 큰물결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며, 대비에 필요한 많은 단계들을 밟아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치적 견해, 사회적 지위, 자신에 대한 평가, 흥미, 취미, 친구, 교제관계, 재능, 기술 등 이런 모든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당신에게 보고 알고 응답하는 능력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을 돕지 못할 것이다.
지금 매우 불확실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변화는 점점 더 심해지며, 때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올 것이다. 지금 앎이 당신을 이끌고 있지만,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느낄 수 있도록 먼저 앎에 응답해야 한다. 이 책 부록에 권고사항을 적어놓았다. 이 권고사항을 따르면,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할 것이다. 그 이상 더 나아가려면, 당신은 내면에 있는 앎의 학생이 되어, 앎길을 배우고, 앎의 힘을 따라야 한다.
이때 당신은 자유롭게 앎에 응답하고, 앎과 함께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 길은 관념이나 믿음이 막아서도 안 되며, 다른 의무감이나 남에 대한 책임감이 막아서도 안 된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사람들이 당신을 너무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 행동이 순수하면, 당신은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이 당신에게 알려준 지시를 따르는 것이며, 그것도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거나 남의 요구나 기대에 부응하려고 타협하는 일 없이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앎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얻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일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자칫 그 저항을 과소평가하기 쉽고, 성공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신은 당신에게 앎의 힘을 주었다. 당신은 신에게 기적을 청할 수도 있고, 가라앉는 배에서 구해달라고 청할 수도 있으며, 다른 많은 것을 기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 당신에게 준 것에 당신이 응답할 수 없다면, 당신의 청원과 기도는 사실상 부정직한 것이며, 무지와 교만과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이다. 신은 당신을 벌하지 않지만, 당신은 스스로 잘못된 길로 들어가 계속해서 선택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을 맛볼 것이다.
새 메시지의 목적은 당신에게 조언하고·경고하며, 당신을 격려하고·준비시키려고 온 것이다. 당신을 지금 준비시키는 것은 당신이 전에 겪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며, 당신이 상상하기조차 힘들 만큼 규모가 크다.
만약 당신이 새 메시지를 단순히 겁주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암울하고 비참한 운명을 예견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은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에 아직 응답하지 못하고,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 큰 힘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것으로, 당신을 안내하고·축복하고·준비시킨다.
자, 이제 보고·배우고·듣고·따를 때다. 세상을 보라. 세상이 주는 신호에 귀를 기울여보라. 세상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무엇이 오고 있다고 말하는지 들어보라. 단순하게 살고, 부담을 덜어내어 삶을 준비하기 시작하라. 누구나 이것은 당장 시작할 수 있다. 단순하게 살라. 불필요한 소유물·소유권·의무감, 심지어는 관계까지도 모두 당신의 에너지를 뺏어가고, 의욕을 잃게 만든다. 또한 당신을 산만하게 하고, 당신의 시간을 다 차지해버리며, 세상이나 주위 상황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마음이 중요하지 않은 다른 것에 매여 있으면, 어렵고 위험한 일이 터질 때까지는 경고신호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단순하게 만들고, 분명하게 해야 한다. 사람이든 장소든, 중요하지 않거나 역효과만 내는 관계는 무엇이든, 당신에게서 통찰력·에너지·목적·의미를 뺏어간다. 가지고 있는 물건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관계·활동·의무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시간을 내고 힘을 내서 변화의 큰물결을 대비하기 시작하라. 왜냐하면 큰물결은 엄청난 집중력과 용기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사람이 살지 말아야 할 곳에 살고 있으며,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종사하고 있다. 부자들은 무의미한 일을 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그들의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며,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엄청난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또한 삶의 의미를 쾌락·방종·중독에 두고 관심을 모두 그곳에 바치고 있다. 많은 점에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보다 더 처량하다. 왜냐하면 인류가 자초하여 세상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키는 진짜 낭비와 오만을 그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삶을 깊이 점검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점검은 당신 삶의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