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10일에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이제 우리는 영적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추정과 오해가 많아, 그로 인해 앎에 직접 다가가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복잡해 보인다. 우리는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앎의 성장, 관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영적 삶과 영적 교사, 영적 가르침, 영적 사상에는 확실한 순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먼저, 물질 삶에는 절대적 진실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절대적 진실은 절대적 상태에 존재하는 것을 위한 것이고, 물질 삶은 분명히 그런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상대적 진실이 있으며, 존재하는 이 상태에 상대적이다.
신은 상대적 현실인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 현실은 변하므로 이곳은 상대적이다. 절대적 현실은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그 현실은 어디로도 가지 않으므로 한결같은 상태이고 완전히 평화롭다. 당신은 그런 현실에 있지 않으며, 또 그 현실이 당신에게 필요하지도 않으므로 이곳에서는 대체로 그 현실을 심지어 찾지도 않는다. 당신은 절대적 현실에 준비되지 않았다. 그 현실은 삶에서 당신 단계가 아니다. 당신은 먼저 이 상대적 현실인 이곳에서 당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상대적 현실을 위한 절대적 진실이 신에게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할 때, 매우 위험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형태의 폭압이 시작된다. 종교적 폭압, 정치적 폭압, 개인적 폭압은 사람들 안에서나 사회 전반에 걸쳐 명백하다. 상대적 상황에 절대적 진실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속박과 노예 상태를 초래하며, 완전히 역효과를 낳는다. 최초의 의도는 선의였을지 모르지만, 곧 폭력과 공격을 낳는다.
당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도전은 자신이 성장 단계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지만, 자신이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해야 한다. 이 단호함과 열려 있음이 바로 성취이다. 변경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당신이 아는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큰 존경심을 가지고 이것을 고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관념이라기보다는 영적 현존에 더 가깝고, 일련의 믿음이나 가설이라기보다는 삶의 관계와 방향에 대한 깊은 느낌이다.
당신은 상대적 현실에서 절대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이것은 현재 당신의 수준이 아니므로, 되지 않는다. 절대자와의 만남에 준비된 사람은 천만 명 중 한 명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신은 천만 명 중 한 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의 계획은 모두를 포함하며, 당신이 사는 이 현실에서 성취와 진보를 보장한다.
물질 영역 너머에 있는 다음 단계의 삶 역시 상대적 현실이겠지만, 상대적 진실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에 절대적이므로 상대적 현실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에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대적 진실이 의미 없거나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상대적 진실은 대단히 효과적이다. 상대적 진실은 당신이 보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하며, 움직이고 있고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
삶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명확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신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며,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이 바로 상대성을 만든다. 그것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며, 어느 곳으로 간다. 절대적인 것은 아무데도 가지 않으며, 이미 도달했다. 여기에는 더이상 움직임이 없다. 당신은 아직 절대적 현실이 있는 곳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절대적 진실을 얻으려는 당신의 시도는 자기기만일 것이고, 당신이 지금 이룰 수 있는 진정한 성취를 가로막을 것이다.
종교적 폭압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상대적 현실에서 절대적 관념을 고수한 결과이다. 이것은 폭력과 증오 등 역효과를 내는 모든 것을 낳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진지하게 앎을 기르고, 이 삶에서 참된 만족을 얻는 일에 진지하다면, 당신은 매우 단호해야 하지만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아는 것을 고수해야 하지만 그것이 종착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상태에 있으므로, 현재 상황처럼 보이는 것에 안주하지 말라.
당신의 미래는 외부적으로 일어나는 일과 내부적으로 자신의 앎에 응답하는 능력으로 거의 결정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당신 삶의 기반을 절대적 관념에 둔다면, 이렇게 응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응답하는 순간 당신은 멈추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어디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보도록 당신의 표지판을 들고 길가에 서 있으면, 단언하건대 삶은 당신 옆을 지나쳐 갈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운명은 저승에 있다. 왜냐하면 그곳이 당신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 오래 머물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항상 되돌아간다.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은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당신은 두 가지 이유로 이곳에 왔고, 이 두 이유는 서로 상반된다. 하나는 신에게서 숨으려고 이곳에 왔다. 왜냐하면 이곳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신을 섬기려고 이곳에 왔다. 이 두 이유는 단지 서로 상반될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당신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을 떠났다고 믿는 당신의 일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을 결코 떠난 적이 없는 당신의 일부이다. 신을 결코 떠난 적이 없는 당신의 일부는 오직 신을 섬길 수만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을 섬기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는 것은 당신의 기쁨이자 환희이며, 속박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정말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 앎이며, 당신의 개인적 현실이 아니다. 당신의 개인적 현실은 신에게서 숨는 것이므로, 세상은 당신이 신을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감각과 자극으로 매 순간을 채우는 법을 배우는 장소가 된다. 이 자극이 지속적으로 당신을 실망시키기 시작할 때만 당신은 앎에 주의를 돌린다. 왜냐하면 얼마 후 실제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불합리하거나 아무도 신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상관없다. 당신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므로, 이제 신을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대체물을 모두 소진했으므로, 신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신을 반드시 신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에게서 나온 자질들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즉 인류에게 봉사하고 싶어 하고, 자극보다는 평화를 바라고, 흥분보다는 평온한 마음을 바라고, 온전함과 정직을 바라고, 나아가고 진보하기를 바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 또한 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주된 목표가 숨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숨어 있을 때는 숨어 있다는 것을 잊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숨는 것은 두렵고 실제로 재미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항상 두려워하고 싶지 않을 것이므로, 숨는 것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숨는 것은 재미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에게 친절했으면 하는 매우 가혹한 현실에서 혼자이고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이 있기를 바라지만, 오늘 신을 만나는 것은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니, 오늘은 신을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신에게 신이 필요할 때는 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곁에 있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부모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상황이 암울하고 배가 고플 때까지는 고향집에서 도망치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상황이 암울하고 배가 고프면 도망칠 동기가 모두 사라졌으므로 당신은 고향집에 가고 싶어 하며, 피난처와 편안함과 안전을 찾는다. 하지만 세상에 와서 지치고 배고플 때, 당신은 고향집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도 이곳에 왔다. 신은 모든 곳에 따라다닌다. 그래서 당신이 도망가도 신은 따라다닌다. 당신은 신을 떨칠 수 없다. 다행히도 이것은 진실이다.
당신은 “이것이 이 책에 담긴 신의 말씀이다.” 또는 “신이 의미 있고 선하려면 신의 현실은 이래야 해.”라고 하면서 신을 믿으며 이런 것들만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신에 대해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을 단순히 해결하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냥 신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서 숨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자신이 아는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당신이 숨어 있을 때는 누군가가 당신을 벌할 것으로 생각한다. 당신은 나쁜 짓을 했으며, 마치 어린 나이에 가출한 것과 같다. 당신은 도망가며, 부모가 당신을 벌할 것이므로 집에 가기가 두렵다.
이제 당신은 멀리 도망쳤고, 집에 가는 것이 매우 무섭다.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만큼, 매우 무섭다. “오, 나는 집에 갈 수 없어!” 이것이 당신이 가진 모든 두려움의 뿌리이다. 이 두려움은 당신의 심리 아래에 깔려 있으며, 이것을 직접적으로 다루면 당신이 매일 마주하는 겹겹이 싸인 많은 망상을 떼어 버릴 만큼 매우 근본적일 것이다.
성실히 앎을 기르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신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연습이 쉬운데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연습을 하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혹은 잘 잊어버린다. 혹은 현존을 느끼면 몇 분 이상은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존은 감당하기 버겁다. 여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고향집에 다시 익숙해지는 일은 단순히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고향집에 다시 익숙해질수록 당신이 숨는 곳은 당신에게 덜 중요해지고, 당신이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 공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닫는다.
세상이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당신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당신이 이 영적 진실을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기원과 운명을 깊이 느끼는 것이며, 단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는 이 영적 진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은 당신 내면의 깊은 체험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 영적 진실은 이곳에는 절대적 진실이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 진실을 만들려 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을 속박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절대적 진실을 가르치면, 다른 사람들도 속박할 것이다.
그다음 영적 진실은, 신은 계획을 이미 세웠고 당신은 그 계획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돌아가는 계획이 있다. 당신은 그 계획을 바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해할 수도 없다. 당신이 신의 계획을 이해하려면, 지금 당신에게 없는 신의 마음이 당신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가 왜 매일 일하러 가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수준의 참여에 도달하지 못했다. 상대적 현실이 절대적 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 현실이 절대적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당신은 절대적 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음, 나는 영원히 성장하고 발전할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당신이 단순히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진실로 성장하고 발전하면 할수록,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더 잘 알 것이고, 성장과 발전이 끝날 무렵이면 매우 지칠 것이다. 그래서 이제 고향집에 가기만을 바란다. 큰 모험은 끝났다. 그렇다고 단념하는 것은 아니며, 당신 내면에 있는 참된 현실이 다시 출현한다. 그래서 여행이 절반 진행되어, 당신은 이미 고향집 중간까지 와 있으며, 더 오래 고향집에 이미 있을수록, 자신의 나머지 일부를 더욱 끌어당기고 싶어 한다. 그리고 더 오래 고향집에 이미 있을수록, 당신과 함께 있는 모든 이를 더욱 끌어당기고 싶어 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끌림이다. 이것은 철학이나 거룩한 사상이 아니다. 당신은 회복한 앎이 조금씩 증가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확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앎으로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 세상에서 사는 모순은 세상이 숨는 곳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받는 것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주고받기 시작하면, 숨는다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당신은 신이 이미 당신을 따라잡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당신의 참된 마음에는 이것이 큰 재결합이다. 당신의 개인적 측면에는 이것이 죽음과 패배처럼 보인다. 당신 마음의 개인적 측면은 당신이 이곳에 있으면서 얻은 것이다. 이 측면의 마음은 신을 모르니, 당신은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듯 신에 대해 가르쳐야 하며, 이 마음이 괜찮을 것임을 이 마음에게 확실히 알려주어야 한다. 나쁜 아이를 대하듯 이 마음과 싸우거나, 이 마음을 벌주지 말라. 어리석다고 나무라지 말라. 이 마음은 자기 생존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신은 이미 계획을 세웠다. 당신이 이 계획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동참하지 않는다. 동참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당신이 실제로 그 계획 밖에 있을 수는 없지만, 참여하지 않고 그 안에서 빈둥거릴 수는 있다. 이것은 마치 큰 무도회와 같다. 많은 사람이 오지만, 소수만 춤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변에 서 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상황이다.
신의 계획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항상 현실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너무 크고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모든 이를 포함한다. 신은 매우 영리하다. 신은 당신이 만든 모든 것과 당신이 상상한 모든 현실을 가지고 모든 것이 큰 끌림으로 저절로 돌아가도록 설정하여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당신 자신의 앎에는 이 끌림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에게서 창조물로 가는 큰 끌림이다. 만약 당신이 이 끌림과 함께 움직인다면, 이 세상에서 비범한 힘과 은총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당신 앎이 빛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여전히 개인적 측면과 개인적 삶이 있겠지만, 은총이 발산되고 있으니, 당신에게 은총이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의 보물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계속해서 다음 영적 진실로 넘어가겠다. 이번에는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말해 보겠다. 당신들이 서로 맺을 수 있는 관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것은 당신이 지닌 마음의 두 측면을 반영한다. 정리해야 하는 관계가 있고, 참된 성취를 위한 관계가 있다.
정리해야 하는 관계는 당신들이 함께하여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에서 배우는 관계이다. 그 잘못들은 자연스럽게 당신 앎을 침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들은 당신을 자극하므로 당신은 그 잘못들을 찾는다. 그 잘못에서 당신이 찾는 목적은 보통 당신이 숨는 것을 더 즐겁게 하고, 숨는 것은 매우 외로우므로 숨는 상태에서는 자연히 부족한 목적과 방향, 참여, 관계에 대한 의식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관계는 정리해야 하고 되돌려야 하는 관계이다. 이 관계들은 실망스럽지만, 아주 많은 일깨움을 준다. 왜냐하면 이 관계들은 당신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당신이 아는 것을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관계는 자신이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함께 어느 곳으로 가기 위해 합류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계이다. 그들은 현존을 느끼고 그들 삶이 진정으로 조화를 이루므로 합류한다. 이 관계는 드물지만 누구나 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관계는 정리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배움을 위한 관계이다. 정리하는 것은 배제하는 것이다. 진짜 배우는 것은 더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더하는 것이지만, 단지 이 세상의 것만 더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는 앎을 기르기 위한 것, 영구적 결과를 낳는 것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이 관계는 단지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관계의 가장 큰 표현은 헌신이다. 왜냐하면 그 헌신이 참이면 그것은 앎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헌신은 개인의 선호나 애착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헌신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어떤 것이다. 당신은 헌신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헌신적이거나 아니면 헌신적이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괜찮다.
신은 당신이 어쨌든 갈 어느 곳으로 가도록 당신을 부를 것이므로, 당신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고 더 강하게 느낄수록, 더욱더 관계의 진짜 기준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관계는 참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관계 정리를 겪어야 하지만, 이 정리가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계속된다면, 참된 유대감을 경험하는 기회가 제한된다.
당신은 아주 적은 것을 포기하여 아주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독신주의자가 되어 수도원에서 살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가진 많은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들은 참된 연합에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포기하는 것에는 어떤 슬픔이 있지만, 생각은 삶 그 자체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고 미미하다.
이것은 그다음 영적 진실로 이어진다. 이 세상 삶에는 오직 세 가지만 있다. 생각이 있고, 이미지가 있으며, 현존이 있다. 생각, 이미지, 현존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면서, 당신은 자신이 주로 자신의 생각을 경험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을 관찰하면 이것은 아주 자명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반응하는 것이 심지어 거기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삶에서 앎을 체험하고 따르는 것을 더 많이 배울수록,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현존은 실제로 거기 있는 것을 당신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는 것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이미지는 부차적이다.
예를 들자면,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매우 끌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오! 나는 이런 감정을 오랫동안 느껴본 적이 없다. 이 사람과 함께할 것이다. 너무 멋지게 느껴진다.”라고 결정할 것이다. 당신에게 생각이 있고 이미지가 있으며, 그것은 멋진 생각이고 멋진 이미지이다. 당신이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 사람은 당신의 생각과 이미지를 자극한다. 그러다 나중에 어느 시점이 되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실망하게 된다. 상대방은 당신의 생각과 이미지만큼 정말 매력적이지 않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이나 이미지와 사랑에 빠졌다가 나중에야 그 사람을 발견했다.
하지만 앎과 함께 있으면, 당신은 먼저 그 사람을 발견한다.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얻든, 그것은 그 사람, 즉 그 사람의 현존, 존재, 큰 마음을 경험한 것에 기반을 둔다. 당신의 관계는 당신들이 같은 장소로 가고 있는지, 함께 갈 수 있는지에 그 기반을 둔다. 이것이 관계에서의 지혜이다. 당신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나서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라. 당신은 상대방의 현존을 사랑하므로 여전히 그 사람을 몹시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삶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당신은 그 사람을 나중에 볼 것이다. 이곳은 단지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곳임을 잊지 말라. 당신은 상황이 다 끝나고 돌아가면 회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생각과 이미지와 현존이다. 생각과 이미지가 사람들의 경험을 지배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당신에게는 마음이 있으므로 생각이 있고, 감각이 있으므로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생각과 이미지를 없애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지배적이라면, 당신은 어떤 것의 현존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당신 자신의 현존이나 다른 사람의 현존, 삶의 현존, 삶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어떤 것에도 현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내적 과정에 완전히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참된 교사들의 목표는 이처럼 자신에게 빠져 있는 것에서 당신을 빼내어 삶에 의미 있게 재결합시키는 것이다. 항상 자기 생각에만 휘말리면, 남는 것은 기대와 실망뿐이다.
삶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다. 삶이 당신을 빼고 가게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내 요점이다. 현존은 항상 당신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은 환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다. 현존은 다른 사람의 현실을 이성적으로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그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는 그 사람이 자신이 가는 곳으로 가는지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어느 곳으로 간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곳으로 간다는 느낌이 없으며, 자신의 로맨스가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이 두 사람은 필요한 상황에 따라 어딘가로 가게 되기를 바라며 상대방이 길을 이끌어 주기를 기다린다. “음, 만약 우리에게 아이가 많으면,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할 거야.”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앎에 관심을 보인 당신에게는 당신 삶의 흐름을 당신 상황에 완전히 맡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다음 영적 진실로 넘어가겠다. 당신은 앎을 기르는 노력에서 혼자가 아니다. 당신과 타고난 관계가 있는 당신의 영적 가족 구성원들은 당신을 가시 영역 밖에서도 돕고, 세상 안에서도 돕는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저 자연스러운 일일 뿐인 위대함을 성취하는 데 당신 혼자의 노력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래서 당신에게는 교사들이 있고, 도움도 있다. 만약 당신이 혼자서 자기 생각에만 있고 싶다면, 숨는 곳에서는 그리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롭다. 당신 마음은 당신이 유일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이다. 심지어 몹시 어려운 이 물질세계조차 사실은 숨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당신 생각 속이다. 만약 당신 생각이 조금씩 열리고 정리되기 시작하면, 당신은 자신을 매우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들이 당신의 영적 가족이다. 이것이 바로 관계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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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당신의 생각 속이다. 당신은 잠에서 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생각할 수 있고, 결코 자신의 생각 밖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의 생각 속에 완전히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당신에게 극적인 일이 일어나서 생각 밖으로 잠시 벗어나는 때만, 삶에서 자신을 체험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비록 이번 삶에서 당신 교사들이 당신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다. 오직 당신이 부름을 받고 그 부름에 응답한 경우에만 그들의 현존이 더 강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도움이 매우 명시적인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 채로 받아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동기 부여를 받았다면, 그들 노력은 어쨌든 그들을 진정한 관계로 데려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이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주에 개인의 창조력이란 없다. 창조력이란 당신이 아는 관계이든 모르는 관계이든, 관계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창조적인 사람”이라는 용어는 모순이다. 오직 창조적인 관계만 있다. 어딘가에서 현실적이고 내재적이고 진짜인 다른 어떤 것에 어떤 사람이 연결되면, 이것은 놀라운 공헌을 낳는다. 이것이 창조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관련된 사람들 자신이 자신을 통해 일하는 더 큰 어떤 것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으므로 매우 신나는 일이다.
참된 결혼은 창조적이다. 참된 우정은 창조적이다. 참된 종교는 창조적이다. 세상에서 하는 참된 일은 창조적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을 통해서 당신이 혼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내놓는 어떤 것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제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신에 대한 두려움, 즉 신이 끝내 그들을 찾아내어 처벌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당신의 잠재의식 안에서 신은 악마와 같아, 매우 어리석고 얼간이 같다는 이유로 당신을 벌하고 박해하는 존재이다. 또는 재미있고 자신이 즐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신이 나타나면 포기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박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신이 모든 것을 빼앗고 당신을 어떤 불행한 성직자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사람들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의 핵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적 이념은 받아들이지만, 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은 모든 곳에서 봉사하며, 이 봉사는 매우 많은 통로를 통해 움직인다. 왜 이렇게 봉사하는가? 왜냐하면 이 봉사는 끌림이라는 자연스러운 힘이고, 중력과 같으며, 모든 것을 통해 길을 찾기 때문이다. 이 봉사는 간섭이 아니라 단순히 끌어당기는 자연스러운 힘이므로, 물질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 재배치할 것이다.
영적 가족이란 바로 이 끌림으로 서로 합류한 이들의 무리를 말하며, 이 무리가 더 높은 현실 상태에서 다른 큰 무리들과 합류할 것이다. 마치 강들이 바다로 가는 도중에 서로 합류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끌림에 기반을 두고 점점 더 큰 연합이 된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끌림은 더 높은 수준에서 점점 더 강력해진다.
여기서 당신은 점점 더 공헌하는 세력이 되며, 이 세력이 바로 실제 당신이다. 왜냐하면 해야 할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천천히 회복되고 있지만, 회복되는 동안에도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공헌하며, 여기에서 당신 자신의 가치가 복원된다. 당신이 어리석은 바보라면 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당신은 너무 부끄러울 것이며,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모든 회복 단계에서, 당신은 가치 있는 선물을 공헌하며, 이때 당신의 가치가 복원된다. 당신은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 창조물의 일부로서 신에게 돌아가야 한다. 신은 비참한 사람들을 모른다. 신은 비참한 사람들을 창조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비참한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어디에나 있고, 신의 끌림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이 끌림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그다음 영적 진실은 개인의 수준에서 받는 교육과정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은 엄청난 자기 단련과 체계를 가진 매우 통제된 삶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떤 것을 성취하고, 내적으로 지략을 모으고, 자신의 생각과 일들을 체계화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통제를 포기하고, 텅 빈 공간과 열린 마음을 직접 마주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숨는 곳 안에 있지만, 신에게 그 열쇠가 있다. 자물쇠가 다르면 열쇠도 다르다. 어떻게 신이 각자에게 맞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신은 당신의 딜레마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신이 그냥 당신을 끌어당기면, 당신의 딜레마는 떨어져 나간다. 그것이 바로 천재성이다. 삶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신은 당신 문제의 모든 복잡함과 당신 삶의 모든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당신 교사들은 당신이 막 저지르려고 하는 다음 잘못에서 당신을 어떻게 구할지를 생각하느라 밤을 지새우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끌림과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끌림을 증폭시키고, 끌림을 표현한다. 그 끌림이 당신의 모든 잘못을 되돌릴 것이다. 신이 당신을 고향집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심지어 이 세상의 압도적인 위협, 매 순간 당신 삶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끌림과 두려움과 유혹조차 신의 끌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