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5월 13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우리는 당신에게 용서를 바라보는 틀을 제공하고, 당신의 성장과 행복에 용서가 관련되어 있음을 볼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요즘 용서에 대한 이상주의가 많다. 영적 사상에 대한 이해를 키운 많은 사람은 이 주제를 아주 상세하게 다루는 책과 가르침을 공부했으며, 심지어 이 주제를 집중해야 할 중요한 영역이라고 여길 정도로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 주제가 그들이 많이 생각한 어떤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 큰 주제가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용서는 복원의 길이며, 당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 활동이다. 용서해야 할 것이 많으므로 용서는 적절한 주제이다. 당신은 자신이 사는 세상으로 인해 쉽게 속상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많은 판단을 내린다. 당신은 크고 작은 많은 상황과 사건으로 인해 화가 나 있다. 당신이 마음의 참된 특질과 자신의 참된 능력을 발견해 나가려면, 화나는 일에 그처럼 많이 시달리면서 어떻게 이 발견을 해내거나 착수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사실 사람들은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결코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천국에서 떨어진 씨앗, 결코 꽃이 피지도 발아하지도 않는 씨앗과 같다. 아주 평범한 겉모습 안에 사람들이 담고 있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과 가능성이다. 당신들은 모두 땅에 뿌려져, 싹을 틔우려고 하는 씨앗들이다. 당신은 비옥한 땅에 있다. 당신은 영양분이 필요하며, 당신의 성장을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당신이 내면에 지닌 것은 당신의 현재 모습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렇게 작고 겉보기에 그렇게 제한적으로 보이는 것이 그런 엄청난 기운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방해하는가? 방해하는 것은 불용서인가? 맞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므로, 우리는 불용서의 개념을 당신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전반적인 삶에 대해 내리는 판단까지 확장하려고 한다. 이 판단들은 당신 마음의 개인적 측면 안에 당신을 가둔다. 사실상 이 판단들이 당신의 개인적 마음을 구성하며, 이 개인적 마음은 매우 제한된 정체성을 나타낸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개인적 마음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 마음을 지니는 것이 세상에 사는 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이곳에 온 진정한 이유는 이 제한된 정체성 너머에 있다. 개인적 마음으로는 당신의 목적을 알 수 없다. 개인적 마음의 가치는 큰 삶이 세상에서 그 자체를 표현해 나가는 데 매개체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큰 삶을 포괄적인 용어인 앎이라고 한다.
당신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내리는 이 지독한 판단을 삶이 정말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판단들이 신의 씨앗을 지닌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의 불용서는 정당하지 않다. 그렇지만 당신은 “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이 사람들은 끔찍하게 폭행당하고 다쳤으며, 곳곳에서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당신이 내 불용서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일어나는 일이 끔찍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항변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의 동의를 꽤 많이 얻겠지만, 당신의 판단은 여전히 정당하지 않다. 당신이 개인적 마음에 머무르고 싶다면, 개인적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니, 그 판단들을 계속 사실이라고 붙잡고 있어도 된다. 개인적 마음은 두려워하고, 흥분하고, 판단한다. 판단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깨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당신은 사물의 겉모습을 꿰뚫고 보기 시작한다.
당신은 세상을 판단하려고 세상에 파견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터무니없는 곳인데, 왜 세상을 판단하는가? 세상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창조물이지만, 이치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세상을 이치에 맞게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라나기를 바라는 중요한 어떤 것을 가져오려고 이곳에 왔으며, 올바른 환경과 격려 및 당신의 용인이 있으면, 그것은 저절로 자라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의 큰 삶이다.
당신의 개인적 마음은 아기를 품은 껍질과 같다. 일단 아기가 껍질을 뚫고 나오기 시작하면 껍질은 버려지고, 그 껍질에서 나오는 생명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자연스럽다. 판단과 불용서는 당신을 껍질에 묶는다. 많은 사람이 그런 판단을 품는 것에 대한 무게와 부담을 알며, 그런 불용서를 품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안다. 그것들은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같다.
용서를 통해 당신은 일시적으로 해방된다. 당신은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당신은 방금 당신 삶에서 적을 하나 제거했다. 그래서 큰 안도감이 생긴다. 용서하면 항상 안도감이 생기며, 그 안도감으로 당신은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상황은 이제 당신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상황이 터무니없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의 삶은 터무니없다.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 왔다.
사람들은 세상에 와서 “나에게 좋은 것은 다 어디 있지?”라고 말하며 실망한다. 세상에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없지만, 당신은 세상에 필요한 것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이치에 맞지만, 세상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세상이 이치에 맞으면, 당신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당신이 세상에서 더 이치에 맞을수록, 당신은 점점 더 이치에 맞지 않게 되며, 당연히 신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는가? 신은 없거나, 사악하다. 아니면 당신이 너무 나쁘고 너무 큰 죄를 범해서 신이 당신을 이곳에 보내 벌을 주고 있다. 이것은 모두 터무니없다! 세상이 기계적으로는 이치에 맞지만, 기계적인 것을 벗어나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당신은 세상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멈출 것이다. 당신들 모두는 세상에 어떤 것을 주려고 왔다. 분명히 당신의 불용서는 당신이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러므로 불용서는 부담이다.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이 지닌 선물, 우리가 당신에게 상기시켜 주는 선물이 하찮은 것으로 느껴진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내리는 판단의 핵심에는 당신 자신의 개인적 수치심이 있다. 왜 수치심이 있는가? 왜냐하면 당신은 삶이 함께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 삶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을 매우 쉽고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치유할 수 있게 하였다. 신이 없는 삶은 극도로 복잡하고, 대단히 끔찍하며, 항상 불안과 전멸의 위협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신을 갖는 것이다. 신을 경험하지 못하면, 당신은 신을 만든다. 이곳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나 신이 있다. 신 없이 산다면, 삶은 의미가 없으며, 끝이다. 그래서 신을 경험하지 못하면, 당신은 신을 만들고 나서 자신이 만든 신을 경험하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이 만든 신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실망에 실망을 거듭한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신을 판단한다. 충분히 완벽한 모습이 아니고, 정의의 영역에서 모범적이지 못하고, 이것은 할 수 없고, 이 부분에서 멍청하고, 너무 크고, 너무 작고, 너무 말랐고, 너무 뚱뚱하고, 너무 어리석고, 너무 진지하고 등등 끝이 없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런 끔찍한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이런 판단을 한다는 것을 안다. 이 판단들은 나를 구속하고 가두고 짓누르며, 괴롭힌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판단을 없앨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는 그 판단을 없앨 수 없지만, 삶에서 그 판단이 필요 없는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으며, 이때 그 판단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신에게는 계획이 있으며, 그 계획이 일하는 방식은 삶에서 해야 하는 의미 있는 어떤 것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와 참여의 의미 있는 기반을 당신에게 준다. 이 판단들을 잘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당신은 불용서라는 방에 머물면서 불용서를 더 좋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 방을 떠날 수는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가 내면에 지닌 이 짐을 없앨 수 있을까? 내 마음은 가시 면류관과 같다.”라고 묻는다. 당신은 가시를 더 편안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당신이 지닌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삶에서 어떤 것을 할 수는 있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의 원천이다. 여기서 당신은 단지 겉모양만 더 매력적이거나, 일시적인 위안이나 편안함만 얻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당신의 판단에 아무 기반이 없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말했다고 당신이 판단을 그만두겠는가? “이 교사는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휙! 생각이 사라진다! “이 교사는 훌륭한 치료사야! 교사가 나에게 치유의 주문을 걸었어!”
당신이 이미 이 주제에 대해 너무 심각하므로,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너무 심각해지고 싶지 않다. 이 주제는 중요하며, 당신은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이것 때문에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앎을 따르는 것이 그 방법이다. 당신은 자신의 가장 깊은 성향에 기반을 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앎이 단지 직관으로 내리는 결정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 그렇지 않다. 이것은 걸음마 단계인 시작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이 시작 단계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앎을 따르는 것은 당신이 지금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을 따르기 위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비난하는 마음을 모두 물리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기혐오를 없애 주는 앎을 점점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면, 당신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씨앗들은 아직 대단하지 않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기꺼이 작아진다. 이것은 그들에게 모욕이 아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작아진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다. 그들에게 작아진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만약 신이 씨앗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작고 얼마나 보잘것없든 지켜야 할 정체성이 없다.
그러므로 앎길을 따르라. 앎길은 매우 단순하지만, 매우 당당하게 이끈다. 쉬운 길은 당당하게 이끄는 길이며, 당신 삶을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만든다. 당신은 지금 길가에 앉아 삶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본성은 복잡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본성을 계속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복잡한 것은 혼란이다. 당신은 복잡하지 않다. 이것을 비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자신을 모든 잠재력을 지닌 다차원적이고 빛나는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그 모든 것보다 더 크다. 생명의 작은 씨앗이 그 모든 것보다 더 크다.
용서가 왜 그렇게 위안이 되는가? 용서는 마음을 열게 하고 긴장을 풀게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 당신이 자신의 마음 너머로 가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당신은 불확실성 안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생각들과 고통스럽게 있으면서 딱딱한 작은 사탕과 같은 그 생각들을 곱씹으며 지내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고하는 데 완전한 변화이며, 당신이 일으킬 수 있는 변화가 아니다. 당신은 마음은 바꿀 수 없으나, 판별하는 습관은 바꿀 수 있다. 당신은 결정은 바꿀 수 있지만, 당신을 바꾸는 것은 더 크다. 당신을 껍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당신이 발명하지도 않았고 지시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그 껍질을 붙잡는 것은 불용서뿐이다. 빠져나오는 것은 당신이다. 이것에는 아무 자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어떤 것도 되려고 하지 않으므로, 다른 것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대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앎을 인지하여 앎을 이용하기 시작하고, 고대 가르침에 따라 앎길을 시작하도록 가르친다. 사람들은 즉시 몇 가지 장애물에 직면한다. 이 장애물 중 주된 것은 그들의 자기혐오를 반영하는 자기 의심이다. 당신 마음이 당신을 아주 여러 번 속였고, 당신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는 것을 아주 여러 번 발견했고, 당신이 대단히 어리석은 짓을 아주 많이 했는데,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것, 규정할 수도 없고 거의 경험하지도 못한 어떤 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앎길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매우 간단한 연습을 제공한다. 연습은 정말 간단하다! 당신은 “오, 이 연습은 매우 어려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루에 30분씩 앎을 경험하는 연습을 하라.”라고 말하면 왜 이것이 어려운가? 사람들은 “이것은 어려워!”라고 말한다. 왜 이것이 어려운가? 당신은 욕실에서 당신 자신을 보는 데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왜 이것이 어려운가?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로 당신 자신에게 하는 투자이다.
이제 이 매우 중요한 요점을 말해 보겠다. 사람들은 자신이 내린 판단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처음에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매우 불길하게 보일 수 있다. 내면은 칠흑같이 어둡고, 끔찍한 생각들, 끔찍한 기억들과 이미지들이 있다. 세상은 당신에게 증오를 가르쳤다. 세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이렇게 가르친다. 당신은 어떤 것을 안다. 그래서 세상은 당신의 기원이 아니다. 당신은 방문자이다. 당신은 단순히 이 세상의 생물학적 조직의 일부가 아니다. 당신은 앎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
이용하지 않는 앎은 엄청난 부담이다. 모든 사람의 신경증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것은 당신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팔을 가진 것과 같다. 하루 종일 가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물건이다. 그렇지 않은가? 팔은 당신 몸에 매달려 있으며 작동은 하는데, 당신은 이것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 방해가 된다.
그래서 자신의 앎을 따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자기 판단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의심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이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이다.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생각이 당신의 길을 방해하면 그 생각을 직시하는 것이다. 당신이 앎의 학생이 되어 내면에 있는 더 깊고 심오한 힘을 따르기 시작하면, 당신은 삶에 대한 자기 판단과 자기 의심에 직면할 것이다.
앎은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앎은 오직 당신 내면에서 발산되기를 원할 뿐이다. 사람들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과거부터 해결되지 않은 온갖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나는 앞으로 20년 동안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그래야 아마도 나는 행복할 수 있고 새로운 관점으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앞으로 해결이 수월해진다. 그렇지 않은가? 20년 동안 과거를 해결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당신은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끝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도 매우 효과적으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처음부터 효과적으로 삶을 사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일단 이 경험을 하면, 자신이 따르는 것이 전적으로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복원되는 것을 직접 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매우 큰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당신의 가치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가치는 그들에게 실연되어야 한다. 우리가 “당신들은 모두 훌륭하므로 당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잊어도 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므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당신의 가치는 실연되어야 한다. 신이 그 일 대부분을 할 것이고, 인정은 모두 당신이 받는다. 신은 인정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해결의 길은 당신이 그 순간에 매우 의식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자신을 목격하기 시작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이것을 확인하여 다른 길을 선택할 만큼 충분히 현존하기 시작할 수 있다. 당신 마음의 개인적 측면은 습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 측면은 습관이 전부이며, 그 전체가 습관으로 이루어진 조직망이다. 그래서 그 자체를 끊임없이 계속 되풀이한다. 당신이 개인적 마음을 보면 볼수록, 이 마음이 얼마나 반복적인지 더 잘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개인적 마음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개인적 측면이 비난받거나 버려져서는 안 된다. 개인적 측면은 유용하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고 매우 유용하지만, 동시에 매우 형편없는 신을 만든다.
앎을 따르기 시작하려면, 당신은 앎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앎을 받을 만하다고 느껴야 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인식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며, 자기혐오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발걸음이다. 단지 당신이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판단에 기반을 두지 않는, 당신 내면의 어떤 것을 따를 때, 당신은 그 판단에서 완전히 멀어진다. 당신이 관심을 기울이거나 다시 동조하지만 않으면, 그 판단들은 그냥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의미 있는 어떤 일, 당신의 갈등과는 무관한 어떤 일을 당신에게 준다. 당신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저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곳에 왔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단순히 당신의 새 삶을 기존의 삶과 관련지으려는 당신의 방식일 뿐이다.
생존은 앎을 따르는 사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삶에 공헌하는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곳의 삶에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곤하지 않은 삶을 산다. 그들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서 이 의미가 흘러나올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떤 곳에 소속되어 자신의 상황에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편안한 어떤 곳에 있으면서 실질적인 어떤 것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정착하여 참여하기 시작할 수 있고, 그들의 가치와 의미는 반복해서 그들에게 실연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와 의미는 실연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한계가 있는 세상에 살므로, 항상 한계가 있을 것이고, 이곳에서 항상 실수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은 세상을 좋아 보이게 만들려고 하지 않으므로 비난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사실 당신은 어떤 것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제 앎이 당신의 공헌을 이끌도록 허용하는 데 적극적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뚱뚱하거나, 너무 마르거나,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너무 어리석거나, 너무 진지하거나, 어느 부분이 너무 지나치더라도,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시도, 그 큰 굴레가 이제 사라지기 시작한다.
신은 공기와 같다. 모든 사람은 신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지만, 결코 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직 사물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매 순간 그들을 유지하는 그 본질, 그들이 사는 자연 그대로의 이 세상을 제공하는 바로 그 본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보다 이 본질이 더 중요할 때, 당신은 삶에 있는 큰 힘을 느낄 것이며, 항상 감사할 것이다.
신이 모든 사람을 고향으로 끌어당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앎이며, 당신을 고향으로 끌어당기고, 감아 들이며, 가까이 끌어들인다. 일단 앎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앎은 스스로 성취하려고 할 것이고, 불용서의 기반 전체가 사라질 것이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고향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세상은 더이상 부정하는 장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