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2일
미국 워싱턴 시애틀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큰 공동체 앎길에서는 답을 찾기가 항상 쉽지 않다. 모든 것이 항상 곧바로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당신이 더 깊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 삶의 핵심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당신 삶의 신비를 설명하는지 알려면, 당신은 단순하고 분명한 것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앎길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은 성장 단계를 거치도록 안내한다. 사람들이 가는 길에 도움이 되도록 다양한 수준에서 정보를 전파하는 다른 교사들이 있지만, 우리의 역할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실제로 큰 공동체의 고대 수업 방식에 따라 앎을 훈련하는 교육 과정을 제시한다.
이제 나는 지각과 현실과 앎에 대해 말하겠다. 먼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당신이 알도록 앎에 대해 몇 가지 말하고자 한다. 앎의 표면에서는 심오한 직관을 경험하고, 심오한 통찰력과 아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은 앎의 표면에서 일어난다. 표면 마음을 넘어서면, 당신은 여전히 이곳에 있으면서 이승과 저승의 삶을 완전히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저승의 삶과 당신을 재결합하게 하고,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전적으로 공헌자가 될 수 있게 한다. 모든 실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이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이룰 수 있는 완벽한 실현이다.
깨달음은 전적으로 다양한 성장 단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다음 단계에서는 자신이 초보자임을 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말할 때, 그들은 자신이 속한 단계에서 정점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물질 삶에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하는 큰 전환점들이 있는데, 이 전환점들은 일반적으로 깨달음으로 간주된다.
대중을 위한 가르침, 지각 범위를 넘어선 곳인 저승에서 오는 많은 가르침이 지금 전해지고 있으므로, 유의해야 할 중요한 점은 가장 대중적인 지도 교사들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정보를 전파한다는 점이다. 정보를 전파하는 것은 입문시키는 일을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역할이다. 그것은 실행하는 데 필요한 기능도 다르다. 정보를 전파하는 것만으로도 말하는 기술이 상당히 필요하며, 개인적·집단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역할이다. 이런 교사와는 달리, 실제로 입문 과정을 담당하지만 좀처럼 공개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지도 교사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극소수의 학생만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상급 단계의 여정을 밟는 데 준비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전파하는 교사들은 결국 앎을 실제로 회복하기 시작할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그들은 길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정보를 전파하는 교사들이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단지 준비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당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전달되는 것은 궁극적인 진실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씨앗을 심는 것에 대비하여 흙을 준비하는 것처럼 시작에 불과하다. 당신이 흙을 준비하면, 그것이 당신이 속한 단계라는 것을 깨달으며, 당신은 그 단계와 다음의 성장 단계를 혼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보를 전파하는 것은 정신적 토양을 준비하는 것, 즉 앎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각을 말할 때,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당신 해석을 말한다. 그것을 다시 한번 말하겠다. 우리는 지각을 말할 때,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당신 해석을 말한다.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해석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직접 경험이란 당신 해석을 넘어선 현실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희귀하고 훌륭한 경험이다. 이것이 당신 경험의 공통분모일 수 있지만, 사실 매우 드물고 경이롭다. 왜냐하면 당신 경험의 99.9%가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라고 내가 말할 때, 이 말은 당신의 제한된 역량과 지각 범위로 인해 당신이 현실을 조금밖에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현실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해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산다. 이것이 모든 어려움의 근원이다. 당신은 삶과 함께하기보다 자기 생각과 더 많이 함께한다. 삶과 함께한다는 것은 당신이 직접 관여하고 직접 경험한다는 뜻이다. 분명히 당신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들, 즉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힘들과 도움이 되지 않는 힘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앉아서 자신의 마음에만 전적으로 관여하고 주변 모든 것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심각하게 불리한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를 안고 있다.
현실과 함께하면 문제가 없지만, 해석과 자기도취와 함께하면 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참된 배움의 초기에는 각자 자신이 얼마나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즉, 자기 마음에 얼마나 많이 관여하고, 삶에 얼마나 적게 관여하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당신이 삶을 실제로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생각만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종종 매우 혼란스럽거나 실망하고 심지어 모욕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참된 경험을 소중히 여기므로, 당신이 참된 경험을 지향하기를 바란다.
정보를 전파하는 교사는 많으며, 나처럼 학생들을 입문시키는 교사는 소수이다. 입문시키는 것은 다른 역할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더 나은 것은 아니며,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것은 내 책임이 소수의 사람에게 앎을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정보를 전파하겠지만, 정보를 전파하는 것은 내 역할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만 관여하고 삶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 경험에 매우 큰 틈을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오직 자기 생각의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신 생각 너머에는 어떤 현실도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 아주 초기에는 사람들이 “당신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 당신이 다른 현실을 살려면 당신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라고 들었다. 당신이 책에서 읽은 내용이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첫 단계일 뿐이다. 여기서 당신은 실제로 자기 생각에 얼마나 전적으로 열심인지 알려면 자기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 생각 너머에 현실이 있다. 사실, 당신 생각 너머에 유일한 현실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 생각은 해석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에는 실제로 창조하는 현실이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마음 너머에 있다. 만약 당신 마음이 열려 있고 균형 잡혀 있고 완전체라면, 창조하는 현실은 당신을 통해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만족감과 성취감의 경험이다.
이 창조적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당신의 개인적 문제는 아주 작아서, 단지 여기저기서 약간의 조정만 하면 된다. 도로를 따라 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당신은 여기서 조금 핸들을 꺾고 저기서 버튼을 누르며 도중에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로를 따라 차를 운전하는 큰 책임이 있고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들이 있음에도, 당신은 그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냥 운전한다! 당신은 운전하는 법을 배워 운전한다! 그래서 앎은 개인적 문제보다 훨씬 더 커서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쉬워진다. 사실, 모든 개인적 문제는 해결하기가 매우 쉽다. 문제는 사람들이 문제를 원하지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르칠 때 실망스러운 것은 배우는 데 항상 양가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문 과정이 오래 걸린다. 이것은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길도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나는 내 현실을 창조한다.”라고 말할 때,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해석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삶의 대부분을 이 해석만 경험할 수 있고, 이 해석이 전부라면, 당신은 자신의 지각 범위가 매우 제한적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내면에 지닌 앎은 당신의 지각을 완전히 열 수 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궁금해하고 질문하고 숙고하고 조종하고 계획하고 일을 꾸미는 등 이처럼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당신 마음의 더 큰 부분인 앎은 당신에게 차츰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
직접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단지 다른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당신이 다른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준비하려면,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 관찰하는 법,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분리하는 법, 친밀감과 사랑이 있는 곳에 마음을 여는 법, 진정한 관계를 받아들이는 법, 적어도 자기 생각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쁜 거래가 아니다!
사실 당신은 현실에 대한 해석만을 창조할 뿐이다. 더 나은 해석이 일시적으로 더 즐거울지 모르지만, 당신은 여전히 자신과 삶에서 분리된다. 바로 이 분리가 연결되어야 한다. 삶은 당신 주변 모든 곳에서 놀라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삶을 경험할 수 없다. 당신 내면의 교사들은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놀라운 방식으로 당신을 돕지만, 당신은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삶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진정한 관계, 당신이 준비되고 그 관계를 열망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관계가 있지만, 당신에게는 역량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창조한 해석 너머에 창조하는 현실이 있다. 당신은 현실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현실이 당신을 위해 창조된다. 당신은 현실이 창조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당신은 세상에 베풀기 위해 저승에서 어떤 것을 가져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세상에 와서 “세상이여, 나에게 현실을 달라! 저승에서 내가 가져온 것을 달라! 본질적인 관계를 달라! 마음의 평화, 평온, 의미, 목적, 방향을 달라!”라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세상은 이것 중 어느 것도 줄 수 없다. 이것들은 당신이 세상에 가져오는 것들이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당신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부모이다. 세상은 당신이 공헌하려고 온 곳이다. 세상은 단지 아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많은 것을 줄 수 없다.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의 책무를 찾는다. 당신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와 당신이 가져온 자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세상은 왜 인간에게 그렇게 어려운 곳인가? 왜냐하면 인간은 저승에서 왔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에게는 세상이 그다지 어려운 곳이 아니지만,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곳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승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훨씬 더 순수한 현실에서 왔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사는 것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신이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알아내야 한다. 결국 당신은 그저 잠시 이곳에 있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곳은 항상 똑같다.
사람들이 삶에서 찾는 것은 목적, 의미, 방향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가져왔다. 세상은 이것들을 받으려고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것들을 찾는다. 이제 어디에서 문제가 꼬였는지 알겠는가? 그것은 마치 부모가 “나를 돌봐줘, 아가야! 내 아빠, 엄마가 되어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자기 앎에 인도받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서 삶에서 진정한 공헌자가 되는 것은 가장 큰 성취이고, 당신이 접촉한 모든 사람과 결코 보지 못할 사람들에게 훌륭한 자원이 될 성취이다. 열려 있는 당신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통로를 제공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우며, 실제로 배우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배운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신전에 들어가려면, 당신은 모든 책, 모든 강의, 모든 사상, 모든 과정 등 이 모든 것을 신전의 바깥 문에 남겨 두어야 한다. 당신은 그냥 들어가며, 교사들이 당신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그곳에 있다. 교사들은 물질 삶에서 앎의 성장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므로 그들은 준비되어 있어서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큰 가능성이다.
나무에서 땅에 떨어진 모든 씨앗이 다 싹트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씨앗은 싹이 틀 것이다. 당신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 항상 군중을 끌어당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요구 사항이 너무 많다고 사람들이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정보를 좀 원했을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관념은 간단하다. 관념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으며, 주는 것도 거의 없다. 하지만 관계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은 것을 제공한다. 의미 있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은 것을 제공한다.
여기서 주안점은 앎이다. 앎은 당신의 개인적 앎이 아니다. 개인적 앎이란 없기 때문이다. 앎에는 단지 개인적 표현만 있을 뿐이다. 개인적 현실도 없다. 큰 현실을 끌어낸다는 것은 당신이 이제 삶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신의 해석을 뛰어넘었다는 뜻이다. 당신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것을 맞는 방향을 가리키는 신호로만 여기라. 이것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것은 당신 마음속에 담긴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경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정확하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면 현실이 있으며, 그 현실은 큰 선물이다. 그래서 이 현실에 도달하는 것은 쌓아 올리기보다는 안착하는 것에 더 가깝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의 해석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고요해지고 관찰하게 된 결과이다. 고요한 마음은 자신의 힘을 모으는 마음이다. 고요한 마음은 마음의 모든 자원을 어떤 방향으로든 보낼 수 있으며, 그것이 세상에서 힘의 정의이다.
집중은 힘이다. 더 집중된 마음은 덜 집중된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이 악이나 파괴에 집중하면, 그 마음은 여전히 덜 집중된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 주제에서 큰 전쟁은 오직 그 전쟁에 전념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자행된다고 말했다. 덜 집중된 마음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은 꽤 분명하다.
그렇지만 선에 집중된 마음은 훨씬 더 강력하다. 그래서 현자들은 숨어 지내며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큰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엉뚱한 사람들의 관심을 너무 많이 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특정인들을 위해 자신을 보호한다.
나는 여기서 더 큰 그림을 그린다. 생각이나 작은 진실에 만족하지 말라. 앎은 여전히 당신 내면에 있으며, 거인처럼 잠자고 있다. 앎이 당신 삶에서 발현될 때까지, 당신 삶은 여전히 해석에 의한 것이다. 당신은 아직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삶은 관계이다. 관계가 실제로 삶의 전부이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이 삶과 떨어져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생각뿐이다. 결국, 삶이 모든 것이다. 삶을 경험하지 않기는 매우 어렵다. 삶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당신은 해석에 의한 자신만의 내적 현실을 만들어야 하며, 그 현실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앎의 교사는 당신을 관념과의 관계에서 끌어내어 삶과의 관계로 데려간다. 그것이 바로 과정이다. 과정의 단계마다 큰 보상이 제공되며, 당신을 더 자유롭게 하고 더 즐겁게 한다. 앎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단순하다. 사실 당신 삶은 매우 단순해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헌신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돌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 삶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큰 행복이며, 이것을 통해 당신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