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26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삶의 진정한 깊이와 목적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당신은 야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적 목표를 달성하고 무언가를 얻는 것은 멋진 일이다. 멋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저 잠깐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얻으려면 큰 대가를 치르는데, 그중 일부는 처음에 치르고, 일부는 나중에 치른다. 그 대가는 긴장, 부정직, 욕망, 탐욕의 측면으로 나타나거나, 비록 가치 있는 목표라 할지라도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수반될 수 있는 다른 문제와 오류의 측면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 목표와 획득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는 그것들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과 당신을 분리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집착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결단력과 진정한 성향을 무시하게 되고, 또 온종일 당신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크고 작은 문제에서 조언하기 위해 당신에게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된다.
당신이 자신에게 “나는 이 일을 시작했고 마침내 해냈어!”라고 말하며 성취의 순간을 느끼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그리고 그 순간은 어떻게 되는가? 그 획득한 것이나 성취한 것을 어떻게 보호하거나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뒤따르지는 않는가? 당신이 도달해야 하는 새로운 목표, 새로운 자리, 고군분투해서 얻어야 하는 새로운 어떤 것을 정해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공허함이 밀려오지는 않는가? 여기서 당신의 성공은 매우 짧고, 새로운 의문과 새로운 불안이 빠르게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물론 당신은 세상에서 큰 격려를 받을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이 당신의 성취에 박수를 보낼 수도 있지만, 이 기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정말 잠깐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큰 노력을 인정할 때 자부심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 기쁜 일인가? 당신 자신의 내적 의문과 욕구가 아직 충족되지 않았는데 칭찬받는 것이 기쁜 일인가? 그래서 당신은 다시 새로운 것을 얻는 일에 착수하여 많은 역경에 대처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감만 주는 또 다른 높은 단계를 이루려고 지나치게 일한다. 만약 성취한다면, 성취하기 전과 후에 치른 대가를 실제로 고려해 보라. 그런 다음 결과적으로 얻은 기쁨이나 만족감을 이렇게 치른 대가와 비교해 보라.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자기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용하여, 이것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헛되고 절망적인 일인지,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성취가 얼마나 적은지, 세상에서 얻는 행복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당신은 분명히 볼 것이다. 비록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지 않고, 가능한 한 윤리적인 방식으로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했고 성취했다 하더라도, 당신이 치른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당신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몰입하는 동안 순간순간 소박한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놓친 채, 삶이 당신을 스쳐 지나가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다음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동안,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알아차리고 있지는 않는가? 어쩌면 최근에 추구하는 것이 실제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알아차리고 있지는 않는가? 어쩌면 그 물건을 소유하거나 이 새로운 능력을 지니는 것이 결국에는 실제로 그다지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은 이 질문들을 숙고해야 하며, 숙고하게 될 것이다. 특히 실망할 때, 또 성공했는데 공허함이 뒤따르고,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나에게 남은 것은 뭐지?”와 같은 염려스러운 의문이 뒤따를 때, 이 질문들을 숙고할 것이다. 사실은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묻는 일이 남는다. 처음에는 아마도 자신의 가치나 자신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가치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정직하다면, 자신의 우선순위와 자신의 동기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 당신이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당신을 계속하게 했는가? 그 일은 정말로 가치가 있는가? 그 일은 정말로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들은 경험을 통해 답을 찾는다. 처음에는 그 경험이 상당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려온 어떤 것과 접촉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일단 당신이 꼭 알아야 하는 진실이 떠오르면, 이 고통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더 큰 통찰과 재조정으로 빠르게 대체된다. 이 경험들은 자기 성찰에서 나온 결과이며, 이 자기 성찰은 종종 커다란 실망에서 시작하고 재평가할 때 하게 된다.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삶의 진정한 깊이와 목적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당신은 야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당신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 중 하나는, 마치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는 것처럼,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물음이다. 많은 사람에게 이 큰 방향 감각 상실은 불안과 두려움이 뒤따른다. 아무런 개인적 목표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행복도, 어떤 성취도, 어떤 가치도, 어떤 관계도 없이 그저 공허함과 절망만 있을 것이라는 불안이 뒤따른다. 만약 앎이 당신 내면에 살지 않는다면,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만약 앎이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면, 당신의 모든 가치는 당신이 하는 일과 당신이 소유한 것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앎은 당신 내면에서, 당신의 개인적 욕망과 두려움 너머에 살아 있는 현실, 당신의 개인적 야심과 개인적 불안 너머, 심지어 당신의 개체성 너머에 살아 있는 현실을 산다. 앎은 당신 내면에서 산다. 앎은 크고, 고요하다.
앎은 당신 내면에서 살지만, 뛰고 있는 심장이나 기능하는 장기처럼 당신은 앎을 의식하지 못한다. 평생 당신 몸이 일할 때, 당신은 몸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거의 진가를 모르며,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앎도 이와 같다. 앎은 매 순간 당신 내면에서 일하지만, 당신의 계획이나 야심과는 무관하므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앎은 무언가를 얻고, 다른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고, 상실에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투쟁과는 무관하다. 앎은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심지어 이런 상태에서도 앎은 당신에게 봉사한다. 앎의 봉사가 대부분 무시되더라도, 여전히 앎은 당신을 보호하며, 때로는 큰 재앙에서 당신을 구하기 위해 당신의 개인적 특권을 무시할 것이다. 그렇지만 앎은 당신의 개인적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 앎은 단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여 당신을 보호하고 지탱하며, 당신이 자아실현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마음이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계획, 목표, 두려움, 불안 및 여기에 수반되는 온갖 환상과 생각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앎은 당신 내면에 살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앎과 함께 있지 않다. 실망을 통해 당신은 앎에 다가간다. 왜냐하면 비록 짧은 순간에 불과하더라도, 실망을 통해 당신이 추구하는 많은 것이 헛되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은 잠시 멈추어 자신의 동기와 주된 노력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재평가를 통해 결국 당신은 줄곧 자기 내면에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 발견은 다른 방향, 소수가 여행한 방향을 당신에게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비롭다. 그러나 그 길은 미지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길을 여행한 이들이 있고, 그들이 자신들의 여정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 당신을 위해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야심을 품고 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심지어 왜 그것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의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인적 이유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정당화와 규정은 당신이 왜 이 길을 선택하는지 정당화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
앎길을 선택할 때, 당신은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야심의 길을 선택할 때, 당신은 다른 이들의 야심을 따른다. 여기에는 함께 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신의 야심을 따르면,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매우 매몰차게 재단할 것이다. 이 단체는 승자라고 하고 저 단체는 패자라고 하며, 이 단체는 선하고 저 단체는 악하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승자 편에 있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다른 길을 선택하려면, 당신은 먼저 멈추어야 한다. 이것을 갖고, 저것이 되고, 이것을 얻고, 저것을 피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다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을 멈추고 잠시 고요히 있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융합의 시기가 시작된다. 말하자면 당신은 꽤 오랫동안 광야에서 헤맬 것이다. 광야에서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실제로 어딘가로 갈 것이다.
참된 길은 개인적 야심의 길이 아니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이 길을 여행한 이들은 모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왜 그곳으로 가는지 모른 채, 여기저기 부딪히며 방황하는 시기를 겪었다. 아무도 여행의 이 부분을 지도로 만들어 보여줄 수 없다. 당신의 이전 야심에 비추어 보거나 그 야심과 어울리는 온갖 기준과 가치관에 비추어 보면, 당신은 길을 잃은 영혼처럼 바보 같고 꽤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길을 잃지 않았다. 당신은 이전만큼 길을 잃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당신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온갖 것들을 갖고, 하고, 또 그것들이 되려고 매일 자신과 싸우고, 자신을 채찍질해서 복종시켰다. 그때 당신은 앎을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길을 잃었다. 비록 이전에 당신이 정직을 소중히 여겼더라도, 자신의 더 깊은 성향을 감지하지 못했으므로 당신은 자신에게 완전히 정직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잘못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당신은 더 정직하지만, 확신이 더 적다는 것을 느낀다. 이제 어쩌면 당신은 자신과 더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규정에 따라 사는 일은 더 적어질 것이다. 지금은 큰 결정을 많이 내리지 않아야 할 때이다. 지금은 마음을 열어야 하고, 단순한 삶, 즉 단순한 직업과 단순한 참여를 유지해야 할 때이다. 당신이 독신이라면, 지금은 주된 관계를 피해야 할 때이다. 당신이 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지금은 주된 관계를 바꾸는 것을 삼가야 할 때이다. 지금은 내적 재평가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러나 이 평가는 정신적 과정이 아니다.
당신이 방황하거나 겉으로 그렇게 보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어떤 방향을 따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단서들이 있고 작은 안내가 있고 당신을 돕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의 길이 여전히 불분명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은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서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의 야심을 상황에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영적 경지에 도달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영적 관계를 맺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영적 부, 영적 힘, 영적 명망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시 자신을 규정하고 길을 잃는다. 이제 그들은 두 배로 길을 잃는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단지 또다시 자신의 야심을 행동에 옮기면서, 자신이 매우 진실한 어떤 것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매우 교화적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지금 이것을 인식하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백만 달러를 벌려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단지 더 교화적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깨닫기가 더 어렵다.
만약 당신이 야심을 멀리하고, 모르는 상태, 불확실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면, 자신의 길이 드러날 것이며, 당신은 천천히 그 길을 따를 것이다. 계속 가다 보면, 자신이 어떤 방향을 따르며, 비록 아직 규정할 수는 없더라도 경험할 수 있는 목적을 향해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당신은 또한 자신이 혼자 여행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동반자들이 당신과 합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야심을 자제하고 스스로 규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더욱 강력하게 나아갈 것이며,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점점 더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안내와 영감과 보호의 원천이 될 것이다. 당신이 자기 삶을 통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않으면, 앎은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나약하거나 수동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당신이 더 큰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여기서 당신은 이전의 자결권을 가지며, 앎을 얻고 더 큰 진실의 삶을 살려는 열망에 그 자결권을 적용한다.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만약 이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게 헌신하고, 기꺼이 헌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면, 당신은 앎길에서 앞으로 나아갈 충분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도기에는 모든 것이 다시 명확히 밝혀진다. 그렇지만 많은 것이 오랫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지금은 당신 자신이 정한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 하는 시기이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다. 당신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온갖 믿음과 가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그 믿음과 가정에서 오는 온갖 판단과 불만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자유이다. 바로 이 자유가 있을 때만, 일단 당신이 이 방향으로 충분히 여행을 하고 나면 야심이 사람들에게 일종의 개인적 지옥이라는 것을 실제로 알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대단한 것들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기쁨이나 만족감이 거의 없으며, 삶에 대한 공감이나 다른 사람과의 동질감이 거의 없다. 이 모든 것이 매우 비극적으로 보이게 된다.
큰 공동체 앎길을 여행하면서, 당신은 특히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 내면에 있는 앎이 드러나도록 허용하여 자신의 활동 분야에서 실용적인 기량과 앎을 결합할 때, 큰 일들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때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에 열중했지만, 방식에서는 달랐다. 그들이 자신의 성취에 대한 보상과 인정을 받은 때도 있지만, 종종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을 따랐다. 그들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더 큰 현실에 참여했다. 그들은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신비만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그들의 개인적 목표는 원동력이 아니었다.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이 되고, 어떤 것을 가지려는 그들의 욕망에서 그들의 힘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은 그들이 참여한 이유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개인적 야심 중 일부가 관련되었지만, 그것들이 지배적이지는 않았다. 개인적 야심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어떤 것도 결코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직 개개인 내면에 있는 앎에서 나와 이들과 협력하여 일하는 다른 이들의 앎과 결합하여 시작된 큰 일만이 더 큰 가치를 지닌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앎길을 선택하여 “광야에서 헤매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언제 누구를 위해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확신이 거의 없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고, 명성도, 영광도, 부도 없다. 그들은 사랑이나 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얻을지 모른다. 그들은 그저 그것을 해야 하므로 그것을 할 뿐이다. 그들은 이전 삶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으로 판명났거나, 아니면 자신을 부르는 다른 어떤 것을 경험했다. 대개는 둘을 함께 경험했다. 자신이 무엇을 창출할지는 그들이 말할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는 그들이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무엇을 가질지는 그들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이제 큰 힘에 달려 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이행하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 의욕적이다. 그들의 결과는 그들 너머에 있다. 그들은 구체적인 결과를 얻든 신비한 결과를 얻든, 그것을 얻는 데 이제 주요 참여자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창조하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단지 지금 창조하는 것에 참여만 한다. 이제 그들에게는 더 큰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함정이 있다. 그들은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특히 그들이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하거나 추구하는 본질과 방향을 결정하려고 하면 더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각자의 삶에서 앎의 현실, 앎의 방향, 앎의 표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앎을 경험하려면, 앎을 따라야 한다. 앎을 소중히 여기려면, 앎을 따라야 한다. 앎을 이해하려면, 앎을 따라야 한다. 앎에서 떨어져 있으면, 앎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으며, “글쎄, 나는 직관을 경험했고 그것이 전부다.” 정도만 말할 수 있다. 앎은 더 크고, 훨씬 더 위대하다. 당신이 앎을 알려면, 앎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앎을 알려면, 야심 없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여행을 시작하려면, 당신의 야심이 실패해야 한다. 사실 야심은 실패하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야심이 무엇이고 무엇을 내놓는지 깨닫기 시작할 뿐이다. 이것은 실패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당신은 야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를 경험하면, 당신은 이처럼 삶을 크게 재구성한다. 당신이 나아감에 따라, 당신 내면에 있는 큰 마음은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의 방향⋅성취⋅의미의 원천이 될 것이다. 당신은 큰 마음을 찾아낼 수 없다. 당신은 오직 가면서 참여하고 배울 수만 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하지만, 자기 삶에서 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신과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정말 어렵다. 그들은 제 마음대로 자기 삶을 통제하려 하거나, 아니면 멀리 있는 신, 그들에게 조언하지 않는 신 등 신에 대한 이런 관념에 굴복하여 포기한다. 이 두 극단이나 그 극단 사이에 있는 모든 태도는 야심에 지배받는다. 지배하려는 사람은 기꺼이 책임을 진다. 순종하는 추종자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 때문에 그 둘은 같은 범주에 있다.
앎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당신 삶에서 앎의 현존과 표현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앎을 따라야 한다. 앎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해야 할 것들을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따라야 한다. 앎은 당신을 어떤 것들을 향해서는 나아가게 하고, 어떤 것들에서는 멀어지게 할 것이다. 앎은 새로운 사람들이 당신과 합류할 기회, 또 기존 사람들이 떠날 기회를 줄 것이다. 이것은 야심 없이 일어난다.
야심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라. 야심은 분리가 잘 돌아가게 하려는 시도이며, 당신이 개인적으로 혼자서 만든 자아를 만족스럽게 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추구가 실패해야 당신에게 큰 삶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깨닫기 시작한다. 당신이 스스로 정하지는 않지만, 표현하려면 당신의 도움과 모든 에너지가 필요한 큰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새로운 삶, 새로운 충동, 새로운 동기이다. 이것은 시작하는 이가 거의 없으므로 드물며, 인간 야심의 경계 너머로 펼쳐지므로 위대하다. 그리고 이것의 근원이 세상 너머에 있으므로 신비로우며, 더 큰 결과를 낳고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므로 유익하다.
다음번에 자신에게 물을 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다른 질문을 자문해 보라. “만약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라. 이 다른 질문을 자문해 보면, 물어볼 새로운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질문이고,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만약 당신이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믿는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당신보다 더 멀리 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내놓는 결과가 무엇인지 보라. 그들 삶의 질을 보라. 그들이 얼마나 만족하는지 보라. 그들이 관계를 맺는 능력을 보고, 동질감과 공동체를 느끼는 그들의 능력을 보라. 그들이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가? 아니면 그들이 소유한 것이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가? 당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신은 삶의 본질을 놓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다시 선택해야 하고 자신에게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