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5월 18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세상에서 해야 할 모든 일과 책임져야 하는 모든 것에는 당연히 자기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자기 의심에 대해 말해보겠다. 의심을 어떻게 직시하고 피할 수 있는지, 피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자기 의심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의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당신이 의심하는 이 자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자기 의심을 경험하면, 단지 의심만 경험한다. 자신을 성찰하는 물음은 거의 없다. 그저 의심만 할 뿐이다. 당신은 불확실하다고 느낀다. 당신은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거나, 도전에 응하거나 일을 완수하는 데 어울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거나, 그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을 염려한다. 그리고 자신을 피하고, 외부에서 의심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피한다. 많은 사람이 거의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이 의심을 느끼는 불편함에 둔감해지려 하고, 자기 의심을 자극하여 의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 의심은 무엇이고, 당신이 의심하는 이 자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을 통해 당신은 실제로 자신에게 두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측면이 있고, 우리가 말하는 비개인적 측면이 있다. 개인적 측면은 당신의 성격, 습관, 관심사, 특이성을 포함한 개인적 마음이다. 개인적 마음은 당신이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얻은 당신의 일부분이며, 당신 주변 세상과 주요 관계에서 조건화된 당신 마음의 모든 부분이다. 개인적 마음은 당신 마음의 일부분이다. 그 마음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고,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 있으며, 그중 일부는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이 개인적 측면이 당신이 의심하는 자기이며, 이 자기는 연약하고 불확실하고 일관성이 없으므로 당신이 의심한다. 이 자기는 당신을 실망하게 했고, 당신을 속였다. 이 자기는 개인적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아주 잘할 수 있고, 실제 사실을 악용할 수 있다. 그리고 기만적이고, 종종 부정직하고, 나약하고, 음모를 꾸민다. 이 자기는 이런 것들이 전부이지만, 사악하지는 않다. 단지 세상이 너무 커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일 뿐이다. 이 자기는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므로, 예상되는 모든 위협과 손실 가능성에 대비해 스스로 무장한다. 그리고 당혹감에 맞서 자신을 무장하고, 사회적⋅물질적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맞서 자신을 무장한다.
이것은 당신의 개인적 측면이고, 당신이 의심하는 자기이다. 당신에게는 자기를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 측면인 자기가 봉사하고 큰 힘과 관계를 맺을 때까지는, 그 자기는 외롭고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을 오용하며, 세상에 맞서, 또 사실이든 상상이든 어떤 침입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경험까지 오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 마음의 개인적 부분이고, 당신이 의심하는 자기이다. 당신이 자신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이 동일시하는 자기이고 순간순간 경험하는 자기라면, 당신은 그 자기를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자기는 당신을 실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신뢰하고,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비판적인 방식이 아니라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의심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자기 몸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몸은 생존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너무 더운 것, 너무 추운 것, 너무 고통스러운 것에 대한 한계점이 있다. 몸에는 무수히 많은 감각이 있다. 몸은 고통과 손상에 취약하고, 꽤 쉽게 파괴될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알며, 몸에는 한계가 있다.
봉사해야 하는 큰 목적, 동질감을 가져야 하는 의미 있는 관계를 고려하면, 개인적 마음은 당신의 유용하고 생산적인 측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마음 역시 한계가 있고, 영원하지 않으며, 현명하지 않다. 그리고 앎의 수준에서 작동할 수 없으며, 어느 정도까지만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 마음의 분석력은 제한적이다. 개인적 마음은 아주 미미하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자극에도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개인적 마음은 두려워할 진짜 이유가 전혀 없는 곳에서도 자주 혼자서 겁을 먹는다. 개인적 마음에는 매우 심각한 한계가 있으며, 당신은 이러한 한계를 알면 그 경계 안에서 개인적 마음이 일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그러면 개인적 마음은 당신의 유용하고 생산적인 측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개인적 마음의 한계와 경계를 모른다면, 당신은 개인적 마음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을 기대할 것이다. 당신은 개인적 마음만으로는 결코 만들어내거나 제공할 수 없는 평화, 평정심, 힘, 용기, 열린 마음, 받아들임, 무조건적 사랑 등을 모두 기대할 것이다. 개인적 마음은 오직 당신 삶에서 큰 힘을 섬기고 받아들일 때만 이러한 큰 경험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당신에게는 의심하고 이해해야 하는 자기가 있는 반면, 완전히 온 마음을 다해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참 자아도 있다. 이 큰 자아는 확실성, 안내, 힘, 용기, 지혜의 근원이다. 그것이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앎은 당신의 불멸의 부분, 즉 삶에서 사명을 이행하도록 완전하고 온전하게 준비되어 세상에 온 당신의 일부분을 나타낸다. 당신은 앎을 비밀 화물처럼 지니고 다닌다. 앎은 지금 이 순간 당신 내면에 있다. 당신은 앎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고, 그 가치를 의심할 수 있다. 당신은 앎이 지닌 지혜의 깊이와 힘의 한계를 의심할 수 있지만, 앎을 알 때까지는 앎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앎을 의심할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은 앎과 결합할 수 있고, 앎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당신 내면에서 앎과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앎을 회피하고, 앎에서 벗어나 숨거나, 앎에 저항하거나, 앎을 비하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앎은 당신 내면에 있다. 당신은 앎을 훼손할 수도 없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다. 그리고 앎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고, 앎을 경험한 범위에서 앎의 안내와 지혜를 잘못 적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앎은 당신 내면에 순수하게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참 자아이다. 당신이 앎을 더 많이 경험하고 더 깊이 이해할수록, 자기 신뢰의 기반은 더 튼튼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당신은 앎을 깊이 경험할 수 있고, 앎을 통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이 자신에게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이 당신에게 준 큰 선물이고, 당신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큰 위안과 안심을 주는 것이다. 앎은 당신 내면에 산다.
앎은 당신 내면에 살지만, 당신은 앎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당신은 앎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하며, 앎을 받아들여 따를 수 있도록 자신을 계발해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큰 공동체 앎길이 당신에게 전해졌다. 앎길은 앎에 다시 접속하는 수단,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단이다. 많은 성장 단계가 있고, 적용할 다양한 기회가 있는 이 큰 여행을 하면서, 당신은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기 신뢰의 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이 큰 기반을 찾지 못한 채, 개인적 마음을 신뢰하려고 하고 의심을 없애려고 하는 것과는 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이 신뢰에는 거짓이 없고, 거짓된 변명도 없으며, 이 신뢰와 관련된 거짓이 없다. 그리고 나약하고 얄팍한 정당화가 없고, 속임수도 부정직도 기만도 없다. 여기에는 이 내적 확신과 함께 겸손이 있다. 그것은 당신이 내면에 있는 매우 큰 어떤 것의 문턱에 서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큰 것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 축복임을 당신이 깨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고, 당신 내면에 있고,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의 중심이 될 수 있으니, 당신에게 축복이다. 당신은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데 이용할 수도 없다. 당신은 그저 그 은총을 따라 삶에서 해결책을 찾고, 관계의 기반을 구축하고, 목적과 공헌을 더 크게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이 앎으로 가는 길을 확립하고, 무엇이 앎의 경험을 확고히 하여, 앞으로 당신이 앎에 의존하는 법과 앎의 현존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는가? 앎과의 연결은 물론 앎과 당신 관계를 확립하려면, 삶의 중요한 시점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그럴듯한 다른 모든 편의와 혜택보다 진실을 선택해야 하고, 자유를 얻고 삶의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면 집착하고 있는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 순간들이 앎이 드러나는 큰 전환점들이다. 앎은 결정의 순간에 선택되므로 드러난다. 이제 앎은 더이상 희망이나 개념이나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다. 앎은 이제 당신 내면에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당신은 그 깊은 성향을 신뢰할 수 있는가? 그 깊은 성향의 일관성과 그 깊이를 인식할 수 있고, 당신이 느낄지도 모르는 다른 온갖 불안⋅욕구⋅강박⋅충동에서 그 성향을 식별할 수 있는가? 그 깊은 성향은 당신 내면에 살며, 깊고 조용하고 강력하다. 광적인 추구, 정신없는 활동, 위험한 참여로 가득한 세상과 비교할 때, 당신 내면에 사는 신의 한 부분보다 당신이 받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가끔 찾아오는 영도 아니고, 열렬히 기도한 후에 당신이 받는 축복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에 살아있는 현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앎에 다가가는 법을 배우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법을 배우면, 당신은 자기 신뢰의 기반을 가질 것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 의심을 해소할 기반을 얻을 것이다.
당신 마음의 개인적 측면은 계속 의심할 것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인적 측면은 오직 의심하거나 믿을 수만 있기 때문이다. 오직 앎만 알 수 있으므로, 그 개인적 측면은 알 수 없다. 개인적 측면은 앎 자체의 일부가 될 때까지, 또 당신 내면에 있는 인간과 신성이 의미 있는 진정한 결혼, 즉 오직 앎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음과 몸과 혼의 진정한 결혼으로 결합할 때까지, 마치 어린아이처럼 확신이 필요하다. 개인적 측면은 계속해서 초조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경솔하게 결정하고 경솔하게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앎의 학생으로서 점점 더 앎길을 따를 때, 당신은 이러한 충동과 불안에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고, 훨씬 더 확실한 것이자 당신 내면에도 있는 것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삶의 공헌자가 되는 데 필수이다. 진정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고 당신이 일해야 하는 곳을 알려면, 또 갈등을 해결하고 정신 환경과 물질 환경을 개선하려면, 당신은 이 내적 힘이 필요하다. 비록 삶이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이곳에서의 당신 삶이 바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또 당신이 왔고 반드시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으려면, 이 내적 힘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에게 이승의 삶과 저승의 삶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에 따라 이 두 삶이 결합하는 것을 경험하려면, 이 내적 힘이 필요하다.
삶은 하찮은 것이 아니고, 양가적이지도 않으며, 완전히 헌신적이다. 모든 곳에서 그렇다.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전념하고, 완전히 헌신하고, 완전히 참여하고, 완전히 결합하고,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당신 내면에서 앎이 더 강해질수록, 당신의 개인적 마음은 큰 기반 자체에 바탕을 두는 큰 기반을 가질 것이고, 자기 의심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다른 의심을 마주할 것이며, 그 의심은 어떤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으니 더 많은 관찰이나 어떤 검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당신 내면에서 알려주는 경고의 신호일 것이다. 이것은 지혜에서 나온 의심이다. 이것은 당신이 무언가 맞지 않다고 느끼거나, 막 내리려는 결정이 최선의 결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내면에서 제지를 느낄 때이다. 이것은 자기 의심이 아니라, 외부의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건전하고 현명하다. 이것은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당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동하는 내적 안내 체계의 일부이다. 당신이 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실수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앎은 당신이 자신을 내줄 수 있는 자리를 찾을 때까지 당신을 제지할 것이다. 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당신을 제지할 것이며, 많은 것에서 당신을 제지할 것이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앎이 자신을 내줄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앎이 당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어떤 것에 내줄 수 있는가? 당신의 개인적 측면은 큰 일을 맡기에는 너무 작고 세상에 너무 얽매여 있다. 큰 책임을 맡고 큰 보상을 받아들이고 큰 도전에 맞서려면, 당신 내면에 있는 앎과 연결된 큰 현실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작은 마음으로 큰 일들을 떠맡으려 하므로 그 결과 자신의 노력이 자신에게 무엇을 제공할지에 대한 감을 잃게 되어, 모든 것이 작아진다.
두려움과 욕망에 얽매인 작은 삶에서 물러나 세상일들에 포함되는 큰 삶으로 나아가려면,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이 필요하다. 당신은 큰 힘을 찾고 있으므로 이 글을 읽고 있다. 당신은 자기 의심에서 벗어나고, 망설이는 것인 양가성에서 벗어나려면 큰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당신의 기반을 찾고 그 기반 위에 구축해야 하는 힘을 찾으려면, 또 큰 목적을 이행하고 큰 의미를 확립하는 데 삶에서 필요한 관계를 찾으려면, 이 큰 힘이 필요하다. 이 필요성은 자연스럽다.
이 접근 방식의 축복은 당신의 개인적 마음이 비방을 받거나 불신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개인적 마음은 거부당하지도, 변변치 않은 것이 되지도, 괄시를 받지도 부정되지도 않는다. 개인적 마음은 세상에서 생겨나서 조건화된 당신 마음의 한 측면으로 그 상태 그대로 인정된다. 개인적 마음은 당신이 이곳에 있으면서 삶의 세부 사항을 다루는 데 필요한 당신 마음의 한 측면이다. 당신은 몸을 통제하는 데도 개인적 마음이 필요하다. 개인적 마음은 몸의 제어판인 배전반과 같으며,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일에서는 매우 유능해질 수 있지만, 큰 기반이 필요하다. 그리고 큰 힘도 필요하며, 자신의 실제 능력을 실현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확실성을 느끼려면, 큰 확신이 필요하다. 개인적 마음은 이러한 큰 맥락에서 자기 가치를 찾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즉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자신이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이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법정 싸움이 종식한다. 이러한 논쟁은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큰 현실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기 시작하고, 멀리 있는 어떤 신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살아있는 영적 현존으로 인지될 때, 당신에게 점차 진정한 기반이 생길 수 있다. 이 기반을 신뢰하는 당신 능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것이다. 이 신뢰는 획득해야 하고, 실감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믿을 수 있는 자원이 될 때까지 실행에 옮겨야 한다.
사람들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시작할 때 종종 자기 삶이 겨우 며칠이나 몇 주, 길게 잡아도 몇 달이면 바뀔 것으로 큰 기대를 한다. 그러나 준비를 계속하면, 이 준비가 많은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이며, 앎의 힘과 현존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실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앎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바뀌고, 그들의 기대도 바뀐다. 그리고 그들의 이상이 대부분 연약하고 거짓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개인적 마음은 자신을 부풀려서 스스로 신적인 힘과 능력을 부여하고, 자기 능력으로 무엇이든 처리하고 어떤 도전도 다룰 수 있다는 잘못된 확신과 거창한 가정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거창한 모든 생각은 당신의 개인적 마음이 느끼는 절망⋅두려움⋅무력감을 숨기는 위장이다. 개인적 마음은 앎에서 자신의 기반을 찾을 때까지 당신 내면에서는 물론 세상에서도 길을 잃는다. 앎에서 기반을 찾고 나서야 개인적 마음은 확신하고 안심하게 되며, 개인적 마음의 하찮은 집착과 불안이 당신에게 점점 더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어쩌면 당신은 이것이 가능한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의심한다면 나는 그 의심을 이해한다. 이 세상에서 이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거의 없다. 의심을 품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일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거나 의미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이 다가가고 있으니, 당신에게는 큰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자신에 대해, 또 자신이 삶에서 하려는 것, 많은 계획과 목표에 대해 원대한 생각이 많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계획이나 목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이 말을 듣고 개인적 마음의 수준을 벗어나 이 말에 응답할 수 있다면, 내 내면에 있는 앎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에 도달했고, 진정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신은 망설이는 것인 양가성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의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당신 삶의 유일한 권위자이자 당신 행동과 습성의 유일한 결정권자인 개인적 마음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정의는 실제로 같다. 말이 다르면 반응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모두 똑같다.
당신의 자유는 큰 힘을 찾고 삶의 큰 목적을 찾아 그것에 합류하고 그것과 결속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앎이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으므로 당신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내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할 수 있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더 깊은 어떤 것이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다. 당신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끔찍한 예상을 할 수도 있으며, 당신 마음이 통제권을 잃고 당신이 조종당하고 있다고 걱정할 수도 있다. 이 모든 두려움은 개인적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개인적 마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개인적 마음은 앎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신의 오류가 매우 명백하기 때문이며, 진정한 확신에 대한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 마음은 큰 힘을 추구하지만, 이 힘에 자신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 마음이 자신을 내줄 작은 힘들은 자신만큼이나 확실하지 않다. 그 힘들은 거창하지만, 그것들 역시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는 힘과 통솔력을 표현한 것들이 많지만, 앎이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가식에 가식을 더한 가식일 뿐이고, 틀림없이 강요와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
강요도 폭력도 필요 없고 기만도 지배도 필요 없는 앎은 참으로 다르다. 앎이 말하는 것은 당신에게 전적으로 자연스럽다. 앎은 당신에게 의미 있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본질이다. 앎은 조용히 온다. 앎은 당신 내면에 산다. 앎은 당신이 앎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앎은 큰 결정의 순간에 자신을 내준다. 앎은 조용히 안도감을 주어 당신을 격려한다. 앎은 당신과 함께 머문다. 당신이 앎과 함께 머무는 법을 배우고, 앎에 다가가고, 앎을 찾고, 앎을 받아들여 앎에 응답하고 앎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면, 당신은 앎의 수혜자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과 의심으로 움츠러들겠지만,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삶에 있는 앎으로 당신을 데려가고, 당신 내면에 있는 진실한 것이 삶에 있는 진실한 것으로 당신을 데려가며, 당신의 본질은 삶의 본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앎이 당신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에는 무성하고 풍성한 생명의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신성의 씨앗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앎이다. 앎을 신뢰하라. 당신이 중대한 시기나 삶의 전환점에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이르면, 갈 수 있는 길이 둘이라는 것을 항상 알 것이다. 앎과 함께하는 길이 있고, 반대 방향의 길이 있다. 반대 방향의 길은 많은 가능성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갈 수 있는 길은 둘뿐이다.
사람들은 앎을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없으므로 어느 결정도 올바르지 않은 의미 없는 결정을 놓고 때때로 고심하고 안달한다. 실제로 앎이 행동할 준비가 되면, 앎은 당신과 당신 주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앎은 그 정도로 큰 힘이 있다. 그렇지만 앎은 당신을 보호하는 것 외에는 자신의 힘을 행사하지 않을 만큼 큰 자비심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때에도 앎의 힘이 부정되고 무시될 수 있다. 당신이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막 하려고 했을 때, 내적 제지를 느끼던 때를 상기해 보라. 당신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드러난 결정을 내렸을 때, 당신 내면에서 꺼림칙함을 느끼던 때를 상기해 보라.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 들떠서 흥분했지만, 나중에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때를 상기해 보라. 만약 자신의 경험을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그 경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을 계속 확실한 궤도 위에 올려놓는 어떤 것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 내면에는 광적이지도, 초조해하지도, 반사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이 살고 있다. 이것을 신뢰하라.
자기 의심은 계속되겠지만, 앎이 강해질수록 자기 의심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삶에서 중요한 결정이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앎과 함께 갈 수도 있고 앎 없이 갈 수도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에게 앎의 이 기반이 있을 때까지, 평화, 평정심, 영성, 은총과 같은 개념은 당신이 설사 체험하더라도 순간적인 체험일 뿐이다. 이 개념은 당신이 이 기반을 구축할 때까지는 살아 있는 현실의 영역 밖에 있다.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삶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큰 힘이 당신 내면에 살기 때문이다. 당신 삶은 더이상 휘몰아치는 열정,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욕구, 격렬한 두려움에 무분별하게 지배받지 않는다. 당신 삶에는 더 열린 마음이 있고, 이 열린 마음을 통해 큰 힘과 은총이 찾아온다. 당신은 이 큰 힘과 은총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큰 힘과 은총이 당신 삶에서 커지고 발현되는 것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당신 삶을 움직인다는 것을 당신이 깨달을 때까지 처음에는 미묘한 방식으로 발현될 것이다. 그 어떤 것은 당신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하고, 확실한 것은 신뢰하라. 일시적인 것은 의심하고, 영원한 것은 신뢰하라. 순간적인 것은 의심하고, 지속될 것은 신뢰하라. 그러면 자기 의심은 현명한 식별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면 우려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진정한 분별력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의심은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되기보다는 당신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능하고, 사실이다. 이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