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함께 일하기

Revelation image for Discernment
1992년 3월 22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2
제6편 > 큰공동체 지혜 2 > 제5장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과 함께 일하는 것은 영적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사는 정신 환경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마음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의문이 많다. 사람들 대부분은 체념하고 따르는 하인처럼 마음을 따른다. 아니면 마치 마음이 겨루어야 하는 사악한 세력이나 아주 성가신 존재나 되는 것처럼 마음과 싸운다. 많은 사람에게 마음은 아무 의심 없이 따르는 어떤 것으로 다루어지거나, 아니면 적으로 여겨진다.

영적 연습을 하면, 당신은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또 생각이 어떤 일관성도 의미 있는 방향도 없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뀐다는 것을 이내 발견한다. 당신은 행동 패턴으로 이어지는 특정 사고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것이 세상에 살면서 생기는 조건화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마음과 함께 일하는 것은 큰 도전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을 집중하고, 마음의 훌륭한 자질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며, 준비⋅연습⋅적용이 필요한 도전이다.

그러면 이제 당신이 마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개념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당신에게는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은 당신을 압도하고, 지배하고, 당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의 독단적으로 당신의 감정을 지배하고 당신의 행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이것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때는 마음을 관찰하고 마음에 지시할 수 있는 전망점, 당신 마음 너머에 전망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어쨌든, 마음을 관찰하고 마음에 지시할 수 있다면, 당신은 마음 안에 있을 리 없다. 말하자면 당신은 마음 밖에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며, 당신이 자기 마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이때까지는 당신이 이 관계를 알지 못한다. 마음은 그저 당신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당신은 그대로 했으며, 아마도 이 점에서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의 마음은 자극을 받아 반응했으며, 당신은 마음이 하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든 했다.

그러나 마음 밖에 서서 마음을 관찰하고 지시할 수 있음을 깨닫는 지점에 도달하면, 당신은 마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음이 큰 적이자 아주 성가신 존재로 보일 수 있다. 마음이 없으면 좋을 텐데! 혹은, 어쩌면 당신은 새로 생긴 의지와 선호에 마음이 더 잘 따라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특정한 일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훌륭한 기계라고 생각하며, 마음은 그러한 일들을 반복적으로 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환경에 반응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마음이 온갖 고통과 불행의 근원인 것처럼, 마음을 벗어나고 싶은 사악한 것으로 여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놀라운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이용하고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용하고 활용하려 할 엄청난 에너지나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의 생각을 바꾸려 하고 마음 자체를 프로그램하려고 한다.

이 접근 방법은 모두 실패할 것이고, 수많은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이 접근 방법 중 어느 것도 마음과의 건강한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 방법들은 마음이 폭군이나 성가신 존재 아니면 하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맺고 싶은가? 당신은 다른 사람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성가신 존재나 하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아니다. 당신이 건강하고 협력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당신과 당신 마음이 동등한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당신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마음은 큰 목적에 봉사하도록 훈련받으면 그리할 수 있다. 마음은 일정 범위에서 책임이 있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면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마음은 주로 몸을 통제하고, 또 당신이 환경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려고 이곳에 있다. 그러나 마음이 효과적이고 건설적으로 그리하려면, 당신은 마음을 외면하거나 지배하거나 정복하거나 마음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에게는 개인적 측면과 비개인적 측면이 있다. 두 측면이 함께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긴 시간을 들여 쌓는 어떤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당신은 개인적 마음에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개인적 마음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편안함과 자극이 필요하다. 비개인적 측면 역시 건강과 기능을 유지하려면 어떤 편안함과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깨닫는다. 이때 마음이 당신에게 봉사할 수 있고, 당신 역시 마음에 봉사할 수 있다.

당신이 육체와 당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육체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더 쉽게 안다. 육체는 당신이 세상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몸에는 통증과 고통이 있고, 필요한 것들이 있으며, 불편함이 있다. 건강한 방식으로 몸에 접근한다면, 몸은 당신이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자산임을 당신은 알 것이다. 물론 사람들 대부분은 몸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몸 또한 폭군이나 성가신 존재, 아니면 하인으로 여긴다. 몸이 폭군이면, 몸의 욕구와 식욕이 당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당신은 그 모든 것 앞에서 비참하고 무력함을 느낀다. 몸이 성가신 존재이면, 당신은 가혹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몸에 반응하기 쉬우며, 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려고 어떤 일을 하도록 몸에 강요한다. 당신이 몸을 하인처럼 대할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당신 몸과 당신의 관계는 당신 마음과 당신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당신 마음은 몸보다 더 영구적이며, 물질적 삶을 지나서도 존재한다. 둘째,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강력하다. 마음은 물질 환경을 초월하는 정신 환경에서 상호 작용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당신의 하인이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이 당신을 섬기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그 관계는 훨씬 더 협력적이어야 한다. 하인은 일반적으로 존경과 배려는 최소한으로 받으며, 요구받는 것은 많다. 이것은 마음에 건강하게 접근하는 방식이 될 수 없으며, 몸에 건강하게 접근하는 방식도 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둘 다 필요한 것이 있고, 둘 다 해야 하는 큰 봉사가 있다. 그렇지만 마음은 몸보다 더 큰 봉사를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 마음은 물질적 삶과 영적 현실 사이에서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마음은 이 큰 두 영역 모두와 소통하며, 영적 현실에서 물질적 삶 속으로 정보가 통과할 수 있는 얇은 막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마음이 세상에서 봉사하는 훌륭한 하인이고 훌륭한 메커니즘으로 여겨질 때만 깨닫고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은 당신의 개인적 하인이 될 수 없다. 당신은 단순히 더 많은 돈,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이익을 얻는 데 마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이렇게 이용하면, 당신은 마음의 더 큰 능력이나 더 큰 의미를 존중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마음을 이용하면, 당신에게 재앙만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안으로 마음을 위한 성장의 큰 형태를 제시한다. 어떻게 이 성장이 이루어지는가? 성장은 당신이 직접 창안하지 않은 준비, 훈련과 분별력을 위한 준비를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준비는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었다. 큰 공동체에 대응하고 큰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는 큰 공동체 앎길이 제공되었다. 앎길은 마음을 훈련하고, 또한 마음과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알맞은 수단이다.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지만, 제한된 메커니즘이므로 어떤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은 적절하고 현명하게 훈련되어야 한다. 마음은 순전히 개인적 이유로만 훈련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더 큰 현실에 봉사하고, 당신 내면에 있는 절실히 필요한 것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기 생각의 일부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하겠지만,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 반드시 이 지시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직접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육체적으로 자신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몸이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음은 훌륭한 자원이지만, 당신은 마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신이 마음에 필요한 어떤 것들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이 필요하고, 역경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는 것이 필요하며, 자극이 필요하다. 마음에는 우리가 “다시 생각하기”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제 다시 생각하기를 말해 보겠다.

당신의 개인적 마음이 큰 통 안에 담긴 온통 무르고 끈끈한 콘크리트와 같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콘크리트를 저어주지 않고 계속 움직여 주지 않으면, 그 콘크리트는 일정한 형태로 굳어진다. 일단 굳어지고 나면, 또다시 유동적으로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마음이 자극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받는 가장 큰 자극은 앎에서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앎에 봉사할 때, 마음은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경험으로 자극받고, 상황이 지금 시기와 관련된 것에 따라 재평가되어야 하는 요구에 자극받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계속 휘저어 유동적으로 유지한다. 이리하여 마음을 젊고, 신선하고, 활동적으로 유지한다. 마음이 굳어지게 놓아두면, 새로운 영향, 새로운 정보, 새로운 관계에 반응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된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마음은 새로운 것에 전혀 반응할 수 없다. 바로 이때 마음이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기를 멈춘다. 바로 이때 마음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가 아주 매우 어려워진다.

마음이 앎을 따른다는 것은 당신 마음이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 마음이 설계할 수도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도 없는 큰 힘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인데, 이처럼 마음이 앎을 따르면, 마음은 계속해서 어떤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큰 힘에 봉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기 관념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자신의 입지만 강화할 것이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다시 규정하고,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생각하기는 교육의 필수 부분이다. 물론 당신이 자신의 교육을 생각해 보면, 심지어 학교에서 행하는 공식적 의미의 교육을 생각해 보아도, 당신은 가장 큰 자극을 받은 학습 과정이나 프로그램이 당신에게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했고, 다른 시각과 관점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새로운 사실들을 숙고해서 자신의 입장을 바꾸거나 아예 입장을 취하지 않도록 요구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마음이 다시 생각할 수 있으려면, 마음이 반응하고 봉사하는 어떤 것, 마음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마음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건강한 관계는 앎과 맺는 관계이며, 앎은 당신 뒤에 있는 “진짜 당신”, 일시적인 사람 뒤에 있는 진짜 존재와 같다. 이처럼 앎과 관계를 맺을 때, 모든 것의 질서가 바로 서며, 육체적으로 당신 자신과도 모든 것의 질서가 바로 서게 된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을 섬기기로 되어 있고, 마음은 앎, 즉 영을 섬기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마음 상태에서 보면 엄청난 변화이다. 개인의 마음 상태에서는 마음이 몸에 봉사하도록 되어 있고, 혹시 영성까지 생각한다면, 영성이 마음에 봉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과의 건강한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당신은 앎에 초점을 두고 앎의 신비가 당신 내면에 존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마음은 기반이나 믿음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구체적인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 믿음 체계가 없으면, 마음은 혼돈 상태에 빠져 어느 방향으로도 초점을 맞출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정신 이상이며, 이때 마음 체계, 즉 사고 체계가 무너져 영의 의지조차 마음을 통해 일할 수 없는 상태이며, 마음은 혼란과 기능 장애에 빠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효과적으로 역할을 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어떤 가정들 및 익숙한 환경이 필요하다. 몸에 음식, 물, 주거지, 옷, 어느 정도의 편안함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에도 안심, 공존할 수 있는 관계, 어떤 시점에서는 안정된 환경,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마음에 필요한 것들이다. 이 필요한 것들을 무시하면, 마음은 혼란에 빠지며, 당신은 마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마음이 고수하는 어떤 관념들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괜찮다. 당신에게는 마음을 자극하는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으며, 이 관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관계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마음이 섬길 수 있는 어떤 것, 마음을 자극하며 마음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유동적으로 유지하고, 이것이 다시 생각하기를 할 수 있게 한다. 이때 마음은 활동적이고 살아 있게 된다. 이때 당신은 마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관계를 쌓지 않으면, 당신은 마음과 함께 일할 수 없다. 당신은 마음을 장악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마음에서 도망칠 것이다.

이것을 영적 연습의 영역으로 가져가 보자. 왜냐하면 여기에서 당신이 마음을 직접 마주하기 때문이다.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울 때, 당신 내면에서 앎이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데, 이때 당신은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당신을 산만하게 하고, 당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등등 끊임없이 이렇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자신이 실제로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기준점이 여전히 자기 마음 안에 있으므로, 마음이 가는 곳이 어디든 당신도 가기 때문이다. 연습에서, 당신은 객관적이고 관찰할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되돌리려고 애쓰지만, 마음은 자리를 뜨며 당신도 함께 데려간다. 마음은 여기저기, 모든 곳에 간다. 마음은 거창한 것들을 생각하고, 터무니없는 것들도 생각하고, 온갖 종류의 시나리오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때 당신은 하찮은 드라마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음은 마치 항상 켜져 있는 텔레비전과 같다.

그렇다면 영적 연습을 할 때, 당신은 항상 켜져 있는 텔레비전을 어떻게 다루는가? 여기서 당신은 스스로 초점을 정한다. 그것은 텔레비전을 어느 한 주파수, 한 채널에 맞추는 것과 같다. 당신은 이렇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오직 연습을 통해서만 이렇게 할 수 있다. 당신에게는 초점이 있어야 하고, 당신 마음 역시 초점이 있어야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초점이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란”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마음은 계속해서 사방으로 가지만, 당신은 마음을 이 단어, 이 소리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초점들도 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불, 당신 내면에 있는 한 점, 당신의 호흡, 당신 몸의 일부 등이 있다. 이때 당신은 눈을 감아도 되고, 떠도 된다. 이렇게 하여 마음을 초점으로 데려오며, 이것으로 마음의 힘이 증폭되고 당신이 마음 밖에 자리를 잡게 된다. 초점을 맞추면 마음 밖에 자리를 잡게 되고, 마음 밖에 있는 이 자리를 경험할 수 있다.

수백수천 번 반복해서 연습한다. 계속 반복해서 음계를 연습해야 하는 음악가들처럼 연습한다. 음악가들은 이 연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당신은 영적 연습에서 마음을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오랜 시간 당신이 이렇게 연습하면, 마음은 무질서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고, 더 한결같아지며, 당신이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든 그 요구에 더 순응하게 된다. 또한 마음에 필요한 것을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당신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음은 어느 정도 유사성이 필요하다. 마음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다룰 수는 없으며, 익숙한 것들에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마음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마음은 앎 뒤를 따라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그리하려면 당신에게 기량과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에 항상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요구하면, 마음은 지칠 것이고,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은 새로운 정보를 계속해서 통합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신이 마음을 너무 억압하면, 결국 마음은 당신에게 반항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균형의 문제가 있다. 앎은 이 균형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앎은 새로운 정보와 자극을 제공하고, 그런 다음 고요한 긴 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고요한 시간 동안, 마음은 통합하는 시간을 갖는다. 다시 생각하기가 허용되고 장려된다. 자극이 있으며, 적응하는 시간, 다시 생각하는 시간, 다시 연상하는 시간이 있다. 이런 식으로 계단을 밟듯, 마음은 내면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면 심지어 가장 익숙하고 소중히 여기는 관념들조차 서서히 성장할 수 있다. 관념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는다. 이 적응은 마치 당신이 매우 성실하게 어떤 것을 쌓는 것처럼, 신중하고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음은 이윽고 당신을 위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마음은 존재할 기반을 갖는다. 마음의 욕구는 존중받고 충족되며, 마음은 계속 자극을 받아 방향을 바꾼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지구에 있는 정부들 대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당신 마음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부와 같다고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정부를 바꾸고 싶고, 정부가 더 생산적이고 더 친절하고 더 효율적이고 더 안정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여기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정부를 정복하고, 정부의 모든 요소를 강제로 굴복시킬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영적 연습을 할 때,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에 접근한다. 혹은 마음을 무시하고 “글쎄, 마음은 언제나 비효율적이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비효율성을 안고 살면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하면 무엇이 바뀌는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정부를 다시 다스리는가? 당신은 어떻게 마음을 다시 다스리는가? 이 질문들은 비슷하다. 마음에는 서로 상호 작용하는 요소가 많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봉사할 더 큰 목적과 더 큰 일련의 우선순위가 없는 한, 마음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는 엄청난 힘이 있어 당신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는 현명한 통치자가 필요하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요소가 있으며, 이것들을 인식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관계로 통합해야 한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닮은 점은 끝없이 많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당신 마음과 당신의 관계에서 현명해지고, 또 당신 마음과 함께 하는 일에서 현명해지면, 당신은 말하자면 현명한 지도자, 현명한 통치자가 된다. 이것은 당신이 다스리는 것에 대한 자비와 존중이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자신이 다스리는 것의 모든 요소를 고려하려고 하고, 가능한 한 최대로 모든 것에 봉사하려고 한다. 이것은 당신이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어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한 두 가지 관념에만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큰 공동체 앎길을 따르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지도력이 생긴다. 큰 공동체 앎길은 균형과 지혜를 낳고,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현명한 정부를 만든다. 그래서 큰 공동체 앎길이 해결의 길이자 실현의 길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외적 삶을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내적 삶은 혼란스럽다. 그것은 마치 “우리는 정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겠지만, 도시를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심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적 삶을 더 온화하거나 더 즐겁거나 더 조화롭게 보이려고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다시 다스리고 자기 마음이라는 정부에 대한 책임을 맡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더 나은 풍경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실제 상황은 같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들을 말하면,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 이것은 나에게 너무 엄청난 일이야!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당신이 그 일부를 하고, 앎이 나머지 일부를 한다.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은 마음을 다루는 법, 마음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며, 마음이 집중할 수 있는 생산적인 것을 마음에 제공한다. 마치 당신이 몸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마음의 일부는 더 큰 어떤 것이 다스린다. 따라서 당신에게는 책임의 범위가 있고, 앎에도 책임의 범위가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당신 소관이지만, 마음에 목적⋅의미⋅방향을 제공하는 것은 앎의 소관이다. 이때 당신은 현명한 관리자와 같지만, 그 상황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인지할 때, 당신은 지혜라는 더 큰 자원을 얻어 자기 소관의 일을 이행할 수 있으며, 이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들이 자기 삶이나 마음을 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므로, 삶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진보했으며, 삶에 큰 유리한 점을 지닌다.